[ 아시아경제 ] 한국은 서양보다 집단주의 성향이 더 강한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집단 내 다수를 따르는 성향’이 있다. 홉스테드가 1980년대 초 발표한 국가별 개인주의 지수는 점수가 낮을수록 개인주의가 낮고 집단주의가 높다는 뜻이었다. 당시 한국의 지수는 100점 만점에 18점에 그쳤다. 한국이 집단주의 사회라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최근에 변화가 발생했다. 홉스테드를 추종하는 외국 연구소가 80년대와 같은 척도로 한국의 개인주의 지수를 다시 측정했다. 놀랍게도 58점(2024년)이 나왔다.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 사회는 서구식 개인주의를 스펀지처럼 흡수한 것이다. 젊은 세대의 결혼·출산 기피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집단주의와 연관된 또 다른 지표인 ‘유교적 역동성’에서는 지금과 80년대 간 점수 차이가 거의 없었다. 요컨대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집단주의 성향과 개인주의 성향이 공존하면서 상황별로 어느 하나가 그때그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는 집단주의 풍조가 다시금 위력을 보였다. 내란폭동 의제와 국회 폭주 의제가 경합할 것으로 본 윤 대통령의 예상은 빗나갔다. 탄핵소추권을 쥔 야당에 여당 일부, 5대 수사기관, 미디어, 대중문화계가 원군으로 가세했다. 계엄 사건 11일 만에 대통령 직무를 정지시켰다.
연예계의 움직임은 특히 흥미로웠다. 첫 번째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불발된 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임영웅은 ‘반려견 생일 축하’ 게시물을 올렸고 차은우는 화보를 올렸다. 둘은 수난을 당했다. 박정희를 “멋진 남자”라고 한 공유의 과거 발언도 비난에 휩싸였다. 이후 그 세계에선 ‘침묵의 나선’이 작동했다. 누구도 더는 눈치 없는 언행을 하지 않았다.
내로라하는 연예인들, 문화예술계가 여러 번 탄핵 촉구 시국 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진보성향이라도 어떤 사건에 관한 생각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서명자 모두가 같은 생각임을 밝히는 이런 시국 선언문은 한국 집단주의의 단면이다. ‘자유로운 영혼’인 연예인들은 별 거리낌 없이 동참했다. “쿠데타 세력 처벌” 등 이들의 선언문 표현은 더불어민주당 논평만큼 직설적이었다. 예술인 특유의 함축과 미학이 느껴지지 않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은 “무력과 강압으로 통제하는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길 바란다”라고만 말해 대비가 됐다. 의사 표현의 집단화 과정에선 표현의 절제도 어려운 법이다.
박근헤 탄핵과 윤석열 탄핵의 공통점은 80%가 넘는 높은 탄핵 찬성 여론이다. 여기엔 ‘특정한 상황 모형이 형성되면 집단주의가 들불처럼 번지고 여론이 한쪽으로 쏠리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속성’도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두 탄핵의 차이점은 박근혜보다 윤석열에 대한 공분이 약하다는 점이다. 결과만 보면, 윤석열의 계엄은 등장인물 중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시민의 일상에 별 영향이 없었다. 줄거리가 엉성한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 든다. 냉소는 할지언정 분노에 휩싸이긴 어렵다. 촛불시위나 여당 내 이탈자의 규모도 박근혜 탄핵 때보다 훨씬 적었다. 윤석열 탄핵은 윤석열 아웃이 먼저냐 이재명 아웃이 먼저냐 하는 정치 게임 성격이 짙어진다.
문제는 게임의 승패를 결정하는 핵심 인자가 법리나 증거가 아니라 집단주의에 편승한 여론이라는 점이다. 집단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 번 형성된 여론재판의 방향은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허만섭 국립강릉원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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