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명·비명 논쟁에 당 안팎 파장
李 “원래 성장 중시하는 중도보수”
민주당 “당 역사에 위배되지 않아”
역대 색깔론 프레임 우려 보수 자처역대 민주당 정치인 ‘보수’ 전례
DJ “시장경제는 보편적 원리”
이해찬 “참여정부는 중도우파”
노무현·문재인 前 대통령도 언급보수층 포용 시도… 내부 설득 필요
역대 강령도 안보·경제 보수적 접근
“선거용 비판엔 정책으로 보여줘야”
“DJP 연합 모방… 집토끼들은 반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민주당은 중도보수 정당’ 발언의 파장이 커지면서 친명(친이재명)계와 비명(비이재명)계 사이에서 민주당의 ‘뿌리 논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전직 대통령들의 발언까지 줄줄이 재조명되며 민주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된 것이다.
이 대표는 지난 19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 이후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은 원래 성장을 중시하는 중도보수 정당”이라며 “우리는 원래 진보 정당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당 안팎에서 논란이 확산되자 강유정 원내대변인은 20일 정책조정회의 이후 기자들과 만나 “중도우파, 중도보수 이런 얘기는 민주당의 역사 안에서 최초로 등장한 용어가 아니고, 민주당의 역사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 대표가 불을 지핀 중도보수 노선이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실제 역대 민주당 정치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보수’를 자처한 전례가 다수 존재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우리 당은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고 서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중도우파 정당”이라고 언급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시장경제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인류의 보편적 원리”라며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강화하려 했다.
이해찬 전 대표는 참여정부 국무총리 시절인 2005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참여정부는 기본적으로 중도우파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유무역협정(FTA)을 적극 추진하면서 시장주의적인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2016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새누리당과 대비해서 진보라는 소리를 약간 듣지만 당의 정체성으로는 보수정당”이라고 했다. 세 전직 대통령은 모두 대북 정책에선 유화책을 쓰면서도, 안보 분야에선 보수적 기조를 유지해 왔다.
선거철마다 보수층을 포용하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정동영 의원은 2007년 대선 후보 시절 ‘보수와 진보를 넘어선 실용주의’를 주장하며 이 대표와 유사한 노선을 탔다. 문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때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통합의 정치’, ‘개혁적 보수까지 포용하는 큰 정치’를 표방했고 2017년 때도 “보수를 적대시하지 않고 통합하겠다”고 강조했다.
역대 강령을 뜯어봐도 민주당은 안보 및 경제 정책에서는 보수적인 색채가 짙었다. 기본적으로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원칙을 유지하되 복지를 통한 분배와 평등을 강조하는 온건한 개혁 노선을 취해 왔다.
민주당이 지금의 이름으로 당명을 개정한 2015년 만들어진 당헌엔 “민주적 시장경제 지향, 민생을 보장하는 정의로운 복지국가 추구,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한 평화통일 준비, 문화국가의 품격 고양, 함께 잘사는 정의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역사적으로 여러 민주당 지도자들이 중도 또는 중도보수 정체성을 수시로 언급했던 것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특수성과도 관련이 있다. 진보와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 자칫 진보 성향을 강조했다가는 ‘색깔론’ 프레임에 걸릴 가능성이 큰 탓이다.
또 정강이나 정책에서 민주당보다 훨씬 진보적인 원내 정당들이 존재한다는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정의당 등 진보정당 계열에서는 민주당을 향해 중도우파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는 목소리가 이어져 왔다.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서 “민주당을 위해서도 한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서도 민주당이 중도우파로 가기를 바라고 있다. 몸에 맞지도 않고 거북스러운 진보 정치 딱지를 떼어버리라고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이 대표 체제에서 외친 ‘중도보수’가 유독 당 안팎에서 비판받는 건 그동안의 민주당 노선에 선을 긋는 등 충분한 설득이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특히 기본소득과 분배가 이 대표를 상징하는 정책이었고 약자를 돌본다는 개념에서 탄생한 당내 을지로위원회 같은 기구들을 볼 때 지금 중도보수와 실용주의 노선이 선거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민주당이 정책으로 성격을 분명히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수영 정치평론가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민주당이 보수의 의제를 실천한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중도보수로 볼 순 없고 ‘중도진보’에 가까운 스탠스로 봐야 한다”면서 “대선 국면에서 표만 된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우클릭 하는 걸로 비쳐지는 순간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 민주당이 중도에서 조금 진보적이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라면서 “당대표가 그렇게 얘기하면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정설이 되는 건지 의아하다”고 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집권을 위해 ‘DJP 연합’을 추진했던 김 전 대통령을 모방하는 것”이라면서 “집토끼들은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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