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우리는 중도보수 정당"이라며 이념 논쟁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실수로 보기 어렵다는 게 여의도 정가의 시선이다. 정체성 논란을 가열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예상한, 의도가 있는 발언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이 대표를 향해 ‘짝퉁 보수’라고 비난했다. 민주당 비명(비이재명)계는 ‘월권’이라고 비판했다. 이 대표가 당 정체성 논란을 휘발성 이슈로 끝내지 않으려 하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 대표는 발언 다음 날 ‘민주당 역사’까지 꺼내며 논쟁을 정치권 화두로 끌어올렸다.
"우리는 원래 진보 정당이 아니다"라는 이 대표 발언은 표면적으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1700자 분량의 더불어민주당 강령 전문을 보면 ‘진보’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다. 강령 첫 문단에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촛불시민혁명의 민주주의 정신을 계승하고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한다’고 당 정체성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핵심은 왜 이 시점에 중도보수론을 꺼냈냐는 점이다.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대표는 현재 여야를 통틀어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로 꼽힌다. 다만 사법리스크는 꺼지지 않은 불씨다. 이 대표는 사법리스크 논란과 관련해 아픈 기억도 있다. 2021년 민주당 대선 경선 ‘3차 선거인단’ 투표에서 대장동 사태가 불거지면서 28.3%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경험했다. 이낙연 전 대표 득표율(62.3%)에 한참 미치지 못한 결과다. 이 대표가 최종 후보로는 선출됐지만, 사법리스크가 표심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확인한 사례였다.
이 대표가 중도보수론을 띄운 것을 놓고 사법리스크 출구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이 대표 선거법 항소심의 최대 관전 포인트는 피선거권이 상실되지 않는 선에서 유죄가 나올 경우"라며 "비명계를 중심으로 당 내부에서는 당장 후보교체론을 띄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높은 중도층 지지율 역시 이 대표가 중도보수론을 강화하는 배경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 14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장래 정치 지도자 선호도 결과에 따르면 중도 성향을 가진 응답자 중 이 대표를 지지한다는 비율은 31%로 가장 높았다. 이는 김문수(10%), 오세훈(3%), 한동훈(5%), 홍준표(3%) 등 여권 잠룡보다 높은 수치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지난 총선에서 진보정당의 맏형 격인 정의당이 원내 정당 진입에 실패한 상황도 주목할 대목이다. 야당 한 의원은 통화에서 "진보층의 남은 대안은 결국 민주당뿐"이라며 "이 대표 입장에서 30%에 달하는 진보층은 집토끼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우클릭 행보가 대선 전략상 유용하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 대표 본연의 정체성을 흔들고 결과적으로 신뢰성을 떨어뜨리게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이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인 2017년 당내 대선 후보로 출사표를 던지면서 중앙 정치무대에서 관심 인물로 떠올랐다. 당내 경선에서 21.2%를 득표했다. 대선 후보로 선출되지는 않았지만, ‘친명계’라는 계파 형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대표는 당시 신뉴딜정책, 30만원 토지배당 등 진보적인 색채를 담은 정책을 제안하며 관심을 모았다.
2017년 3월 19일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는 경선 5차 합동토론회에서 "이 후보는 진보를 늘 주창하다가 나는 보수주의자다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고 뼈 있는 지적을 전했다. 이 대표를 둘러싼 당 안팎의 의구심은 정치적인 부담 요인이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정치인 이재명은 민주당 내 족보가 분명치 않다. 좋게 말하면 유연성이 높고, 나쁘게 말하면 신뢰성이 부족하다"며 "자칫 메시지가 좋더라도, 메신저의 신뢰성 확보가 안 되면 좋은 정책도 기대만큼 효과를 내기 힘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동우 기자 dw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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