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민주주의와 독재 정치 연구의 전문가인 댄 슬레이터 미국 미시간대 정치학 교수는 한국이 비상계엄 선포에 맞서 싸운 방식을 "21세기 가장 고무적인 민주주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위헌 소지가 있는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을 탄핵소추해 책임을 묻고, 개헌을 논의하며 재발 방지책을 찾는 것은 전 세계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든 모범적 모델이란 평가다.
다만 그는 현재 한국 정치권 최대 화두 중 하나인 '개헌'에 대해선 최우선 과제가 돼선 안 된다고 했다. "한국에서 더 심각한 문제는 제도(대통령제)가 아니라 사회 양극화, 민주적 규범·규칙을 지키지 않는 정치적 권리 행사"이기 때문에 개헌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란 생각을 가져선 안 된다는 취지다.
슬레이터 교수는 28일 아시아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한국은 최근 큰 위기를 겪었고, 지금까지는 훌륭하게 이를 극복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약 20년간 시카고대와 미시간대에서 국제관계, 민주주의 역사를 연구한 석학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경제발전과 민주화, 권위주의 등을 연구해 책을 펴낼 만큼 '아시아 민주주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슬레이터 교수의 주요 저서로는 동남아시아 7개국을 중심으로 권위주의 체제의 지속력과 국가 권력의 변동성을 분석한 'Ordering Power: Contentious Politics and Authoritarian Leviathans in Southeast Asia(2010)'와 아시아 국가들의 급격한 경제 발전을 민주주의와 연결해 분석한 'From Development to Democracy: The Transformations of Modern Asia(2022)' 등이 있다. 현재는 미시간대 국제연구소의 신흥 민주주의 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슬레이터 교수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극우 정치 세력이 힘을 얻는 것을 두고는 "경제침체와 불평등에 대한 분노"에서 원인을 찾았다.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극우 행보를 보이고 있고, 지난 24일 독일 총선에선 극우당 독일을위한대안(AfD)이 원내 2당이 되는 등 유럽에서도 확산세가 뚜렷하다. 한국 역시 보수정당의 극우화가 이슈다. 그는 "냉소적인 정치인과 점점 더 독성이 강해지는 미디어가 이를 부추긴다"고 우려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은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이 선포된 이후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다. 10년도 안 돼 또다시 대통령이 탄핵 위기를 맞았고, 여론은 양극화됐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 상태를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이 계엄령 선포에 대응하는 방식은 전 세계에 빛나는 모범이 됐다. 헌법을 무시한 지도자에게 책임을 묻는 모습을 다른 나라의 많은 사람이 부러운 눈으로 지켜봤다. 물론 한국은 전 세계 많은 나라들처럼 심각한 정치적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를 지속해서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그러나 제 평가로는 한국은 최근 큰 위기를 겪었고, 지금까지는 훌륭하게 이를 극복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는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비롯됐으며 대통령 4년 중임제나 의원내각제와 같은 방향으로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대통령제가 일반적으로 의원내각제보다 더 취약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각 나라는 자신에게 맞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정해진 청사진은 없다. 그러나 선출된 최고 공직자들이 민주주의에 더 큰 피해를 주고 있는 시대에는 (대통령에 대한) 제약을 강화하거나, 더 나아가 대통령제 종식을 고려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이 이런 선택지를 놓고 활발히 논의하는 것은 매우 건강한 일이다.
-한국이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개헌을 해야 한다고 보나. 만약 대통령 권한을 분산하기 위해 개헌을 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것은 외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문제가 아니다. 내부적인 협상과 숙의 과정을 통해서만 (개헌에) 필요한 정치적 지지를 얻고, 한국의 견고한 민주주의 전통에 부합하는 개혁이 이뤄질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 더 심각한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사회의 양극화, 특히 민주적 규범과 규칙 내에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려는 의지가 감소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제도를 바꾸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개헌을) 일종의 빠른 해결책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전 세계적으로 극우 정당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됐고, 유럽도 우파 정당이 강세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앞으로도 이러한 추세가 계속될까.
▲젊은 유권자, 특히 젊은 남성들이 기성세대보다 극우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봤을 때 이런 추세는 이제 막 시작된 것 같다. 중도 우파 정당이 쇠퇴하거나 극우를 포용하고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 정당 시스템에도 이러한 추세가 확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많은 국가에서 극우가 지지를 받는 것에) 공통된 원인은 없지만 저는 경제 침체와 불평등에서 비롯된 분노에 주목하고 싶다. 이건 실제로 많이 존재하는 문제다. 그것이 소수자와 이민자들에 대한 편집증으로 이어지는데, 저는 이것이 대체로 조작된 것이며 냉소적인 정치인들과 점점 더 독성이 강해지는 미디어 환경에 의해 부추겨진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선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대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선거 불신이 커지면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저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너무 강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경쟁적인 선거는 민주주의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 정치적 조직을 만들 자유, 사법적 괴롭힘과 법적 위협에서 자유로운 것도 중요하다. 요즘 우리는 민주주의가 건강한지 판단할 때 민주주의 공약을 가진 후보자가 당선됐는지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선거 자체보다는 선출된 정치인들이 그들이 얻은 권력으로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직면해 있는 한국 국민에게 조언해 준다면.
▲자책하지 말고 패배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러분이 충격적인 비상계엄 선포에 맞서 싸운 방식은 21세기 가장 고무적인 민주주의 승리 중 하나였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영감을 달라. 전 세계는 지금 그 어떤 때보다 많은 영감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문제원 기자 nest263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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