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배우 3명의 탄탄한 일품 연기…치밀한 연출·대본의 힘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진품에는 예술가의 고뇌의 흔적이 남아 있어 완벽하지 않지만, 솜씨 좋은 위작은 오히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그려진다."
최근 서울 대학로 소극장 거리에서 탄탄한 중견 배우들의 연기력과 연출·대본의 치밀함으로 관객과 평단의 이목을 사로잡은 수사극 한 편이 화제다. 배우 출신의 연출가 원종철과 최근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작가 신성우가 의기투합한 소극장 연극 '어메이징 그레이스'다.
2018년 초연된 작품을 3인극으로 재구성한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매력적인 미술품 사기범 그레이스와 그녀를 처벌하려는 검사, 자신의 사회운동을 위해 그녀를 석방하려는 변호사가 벌이는 치열한 수사 공방을 담은 작품이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사건과 신정아 학력 위조 사건 등을 모티브로 절묘하게 뒤섞인 진짜와 가짜의 삶을 보여주며 관객 스스로가 어떤 삶을 선택할지 고민하게 하는 힘이 있다.
복잡한 미술품 사기 사건을 소재로 진짜와 가짜의 논리가 어지럽게 펼쳐지기 때문에 초반에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 때문에 원종철 연출가는 극 중반에 의도적으로 검사의 수사 브리핑 장면을 집어넣어 관객의 이해를 도왔다. 검사 역의 배우 김동현이 원숙한 발성과 능숙한 연기로 실제 수사 브리핑을 방불케 하는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온갖 궤변으로 수사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그레이스 역의 배우 서지유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뮤지컬 배우로 시작해 이제는 연극배우로서 입지를 굳힌 서지유의 굵직한 연기는 억지 논리로만 가득 채워진 그레이스라는 캐릭터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극 초반 그레이스의 해괴한 주장에 고개를 젓던 관객들은 어느새 그녀의 논리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관객은 명료하게 보였던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과장된 대사와 톤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변호사 역의 배우 신현종의 연기도 일품이다. 실제로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볼 법한 노회한 변호사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특히 저열한 물질 만능 자본주의 사회에 일격을 가했다며 칭송하던 변호사가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그레이스에게 질려 돌변하는 모습은 관객을 소름 끼치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씨어터쿰의 넓고 깊은 무대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원종철의 무대 연출력도 돋보였다. 검사가 피의자를 취조하거나 변호사가 의뢰인을 만날 때는 무대 중간을 흰 벽으로 막아 긴장감을 조성하고, 그레이스가 미술품 경매를 하는 장면에선 흰 벽을 터놓아 극적인 무대 변화를 줬다. 특히 텅 빈 액자로 설정한 위작 그림의 프레임 안으로 그레이스가 직접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모호해진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서 진지한 삶의 성찰을 끌어내는 연극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13일까지 서울 대학로 씨어터쿰에서 상연된다.
h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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