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드디어 꿈의 바이칼로
이제 바이칼, 그 호수를 찾아 떠났다. 아니, 모든 사람이 모두 입을 모아 '바다'라고 부르는 그 '호수'에를 가야 했다. 강변 도시 이르쿠츠크를 떠나 안가라강의 원류, 우리의 목적지인 바이칼을 향해 400㎞를 거슬러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
절반은 포장돼있고, 절반은 비포장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한국제 대형버스로도 전체 주행 시간은 일곱 시간이 더 걸렸다. 일곱 시간을 달려도, 달려도, 시야에는 끝없이 펼쳐진 목초지뿐이다.
정말로 나는 이렇게 넓은 땅을 처음 봤다. 소위 지평선이라는 것이 이렇게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하다.
그래서 옛날에는 여기를 걷는다는 일은 상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잘 달리는 말만이 이 드넓은 땅에서 사람을 한 곳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지루한 시간에 전임 주러시아 대사이자 러시아 전공의 역사학 박사인 이인호 교수의 명강의가 압권이었다.
모두 졸거나 잠들었거나 각각의 상념에 빠져 있는 줄을 알면서도 이 교수는 제정러시아 말기로부터 볼셰비키 혁명을 거쳐 구소비에트연방의 성립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거대한 땅과 관련해 자세히 들려준다.
다만 몇 사람만이 깨어서 듣고 있음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노교수의 명강의는 바이칼 여행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백미였다.
이곳은 러시아 땅 시베리아에서는 가장 남쪽이다. 그러나 위도상으로는 북위 55도에서 51도에 걸쳐 있어 우리에게는 한참 북국(北國)이다. 지구상의 담수를 다 합친 양의 1/5이 이 호수에 담겨 있다. 물의 깊이가 최고 1천637m로 지구상에 이런 깊은 호수는 없다.
길이가 636㎞, 폭이 가장 넓은 곳이 80㎞, 좁은 곳이 27㎞, 평균 넓이가 48㎞인 광대한 면적이다. 말이 호수이지 정말 한마디로 바다라 해야 한다. 지질학적으로는 5억년이 넘은 변성암, 퇴적암, 화성암으로 이루어졌다는데 그 신비스러운 태고의 분위기대로 서식하는 동식물도 독특하고 풍부하고 다양하다.
1천200종이 넘는 동물, 600종이 넘는 식물이 사는데 그중 4분의 3이 바이칼의 고유종이다. 흰 연어와 철갑상어가 있고, 바이칼 물범은 특히 재미난 녀석이다. 이 호수가 바다였을 때 살던 놈이 담수가 된 후에도 살아남아 지구상 유일한 담수 물범으로 유명하다.
부랴트 몽골인의 말로 바이칼은 '풍부한 물'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깨끗하고 풍부한 물은 이 세상 다른 곳에는 없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성스러운 바다', '시베리아의 푸른 눈', '땅의 오아시스', '하느님의 신성한 선물', '생태적 보물창고'라고 불린다.
1996년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도중에, 길가에 군데군데 솟대와 장승이 서 있다. 우리의 솟대, 장승과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의미는 똑같다. 거기다 헝겊을 매달아 소원을 비는 것이나, 제수를 바치는 것이나 술을 따르는 것이 모두 같다,
다만 여기서는 따르는 술이 막걸리나 소주가 아니라, 보드카라는 점만이 서양식 분위기를 내고 있고, 심지어는 담배도, 동전도 얹어놓고 소원을 빈단다. 샤머니즘은 세상 어느 물건에도 정령이 깃들여 있다고 믿고, 그래서 신은 수천 가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하늘의 선신(善神)과 지하의 악신(惡靈)이 모두 존재하며 어떤 일에 대해서는 그 악령에게 빌어야 할 때도 있다. 세상에 수천 가지 귀신이 있고 악마에게도 간절히 빌어야 할 때가 있다니, 과연 샤머니즘은 원시종교라고 하겠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네 무당들이 인도하는 것과 똑같으니, 그 점에서 친근감을 느꼈다.
하늘의 선신을 이 사람들은 옛날에 '탱그리'라고 불렀는데, 앞에 말했듯이 육당 최남선은 그 탱그리가 '단군'(檀君)의 어원이라 하고 '당구리'는 우리말의 무당이라고 했다.
또 하나 나에게 인상 깊이 남아있는 책이 있었는데 오래전이라 책 제목을 잊었지만 '반구대 암각화의 기원 연구'라 했던가. 그런 책이었는데 그와 같은 양식의 암각화가 이동해 온 경로를 추적해 보면 결국 부랴트와 바이칼호에 와 닿는다는 결론이었다.
나는 그 이론을 대부분 긍정적으로 수용했지만 다만 한 가지 왜 그 인종이 험악한 알타이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던 가에 관해서는 설명이 부족한 듯했다.
바얀다이 마을과 옐란찌 마을을 지나서 일곱 시간 만에 우리가 닿은 곳은 알혼섬으로 건너가는 선착장이다. 선착장에 닿기 약 5분 전부터 바이칼의 드넓은 수면이 목초지 언덕 너머로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물가에 섰다. 호수 바닥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그 유명한 바이칼의 맑은 물이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가장 맑은 물이었다.
지구상 모든 담수를 다 합친 수량의 5분의 1에 달하는 엄청난 물이지만 이상스러울 만큼, 신비스러울 만큼 자체 정화작용을 일으켜서 이 깨끗함이 유지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호수의 수면 아래 30∼50m에서 그냥 떠 담으면 에비앙이 아니라 세상 어느 눈 녹은 물보다도 더 맑은 먹는 샘물이 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전날 먹은 페트병에는 라벨에 'Legend of Baikal'(바이칼의 전설)이라고 쓰여 있다. 좋은 와인을 마실 때 그 라벨을 떼어 보관하듯이 바이칼의 전설이라는 라벨을 한 장 떼어 소중히 보관했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수영하기도 하고, 다른 한쪽 물가에서는 이들의 주식(主食)에 가까운 '오물'(омуль, 학명: Coregonus autumnalis)을 훈제하느라 철판으로 된 상자에다 자작나무 장작을 때고 있었다. 오물은 크기와 모양이 정어리 비슷하게 생긴 바이칼의 기름기 많은 생선인데 내장을 빼고 통째로 소금을 발라 자작나무 불에 훈제해 그 자리에서 손으로 뜯어 먹는다.
도중에, 식당에서 먹은 오물 회는 그런대로 먹을 만했는데, 그건 우리에게만 주는 것이지 이들에게 일상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탈 배는 러시아 해군에서 쓰던 배를 그대로 쓴다는 바지선 비슷한 독특한 모양의 페리보트다.
주 정부에서 15분 간격으로 운항하는데 요금은 무료다. 그래서 예비군복을 입은 선원들 사정에 따라 출발 시간도 도착 시간도 좀 제멋대로라고 한다. 버스를 그대로 실을 수 있으니 꽤 큰 배다. 그리고 10분쯤, 그저 건너편 섬이 눈앞에 바라보이는 좁은 해협 정도를 건너서, '바이칼의 배꼽'이라는 알혼(остров Ольхон)섬에 내렸다.
◇ 알혼 섬
선착장에 내려 다시 먼지가 펄펄 날리는 비포장 길을 따라 이 섬의 중심지인 후지르 마을까지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렸다. 알혼이란 말은 '메마른', '나무가 없는'이라는 뜻이다. 나무가 없는 섬의 남북 길이가 72㎞, 동서의 폭이 15㎞라니 작은 섬이 아니다.
그러나 이 큰 섬에 주민은 1천500명이 못 됐다. 그리고 대부분이 후지르 마을에 몰려 산다.
대부분이 부랴트 민족이다. 우리와 똑같이 생겼다. 특히 어린이들을 보면 우리 어린애들 같다. 그래서 이곳을 부랴트 민족의 근원지라고 하는 것 같다. 특히 부랴트족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호리도이가 백조의 날개를 감췄다는 신화의 무대가 알혼섬이다.
전설에는 바이칼의 여러 신이 알혼 섬에 모여 살았는데 그중 흰 독수리 모양을 한 '한후테바바이'의 아들 한쑤부-노이온이 처음으로 하늘신(탱그르)으로부터 샤먼의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해 이곳이 모든 샤먼의 성지로 여겨진다.
칭기즈칸 정복 시절에는 라마교의 탄압을 받은 샤먼이 모두 몸을 피해 이곳에 모여 살았다. 그래서 해마다 이곳에서는 세계 샤먼 축제가 열린다.
이 마을에는 마치 서부활극 시대의 어느 시골 마을처럼 황량하고 너른 벌판에 통나무집들이 늘어서 있다. 오래된 집도 있고 최근에 새로 지은 민박집 스타일도 있다. 이런 통나무집들을 '뚜르바잘'이라고 한다. 저녁 식탁에는 정식으로 러시아식 수프와 빵에 훈제 '오물'에 '빌민'이라고 하는 만둣국이 괜찮았다.
다음에는 '샤슬릭'이라고 하는 돼지고기 꼬치구이가 나왔다. 역시 자작나무 태운 향기가 배었다. 거기에 보드카를 마시니 제격이다. 여기서는 보드카를 아주 차게 해 주지를 않는다. 하기야 냉동시설도 없다.
다만 생맥주는 찬 게 있어서, 미지근한 보드카를 마시면서 차가운 맥주를 '체이서'로 홀짝거리니 취하기로는 그 이상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뜨거운 홍차가 약간은 술기운을 진정시킨다.
우리 옛날 시골집처럼 마당 뒤편으로 독립된 화장실이 있고, 그 형식은 '퍼내기'식이다. 저장조가 어찌나 크고 깊은지 겁이 나지만 다행히 바닥에 뚫린 구멍이 작아서 몸이 통째로 빠질 것 같지는 않다. 코골이가 걱정되어 독방을 청했지만, 칸막이가 허술해서 옆방의 선배는 나의 코 고는 소리에 여러 번을 깨었다고 불평(?)하셨다.
그냥 소련제 탱크 지나가는 소리가 시끄러워서가 아니라 그게 갑자기 멈췄다가 다시 시작할 때까지 한참을 아무 소리가 안 나는데 바로 그 조용한 시간이 사람을 긴장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도 나름대로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했다. 무서운 모기 때문이다. 나는 모기가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놈이 나에게만 달려들어 공격하는데 그 가려움이 상상 이상으로 참기 힘들다. 그래서 물론 모기약이라고 생긴 것은 모두 다 챙겨왔다.
태우는 것, 붙이는 것, 뿌리는 것, 바르는 것, 그것도 물리기 전에 바르는 것, 후에 바르는 것, 그래도 별 소용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모기는 모두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 모양이다. 바이칼의 습지와 숲과 모기와 진드기와 그 지독한 가려움 이야기를 익히 들었기 때문이지만 나는 그들에게도 어쩔 수 없이 매력적인 남자인가 보다.
다만 한 가지 감사할 일은 모기와 소변 때문에, 때로는 내 코 고는 소리에 잠시 잠시 깰 때마다 콧속으로 느껴지는 그 신선한 공기의 맛이 정말로 '달다'라고 밖에는 무슨 표현을 달리할 수 없을 만큼 달았다.
매번 숨을 쉴 때마다 '참 달다'라고 느끼는 일은 참 신기했다. 숨을 쉴 때마다 '왜, 어쩌면 이렇게 공기 맛이 달까'라고 느낀다면 평생을 정말로 달게 느끼며 사는 것일 테다.
게다가 마당을 가로질러 화장실에 다녀오자면 하늘에는 하나 가득 별과 달이 둘러앉아 밤샘 파티를 벌였는데 그중에 춤을 추다가 급한 놈은 발을 헛디디는지 별똥이 돼 떨어졌다.
잠시만 서 있어도 열 개 이상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 떨어지는 짧은 불꽃놀이의 시간 동안 별똥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누가 그랬던가. 여기서 저리 많은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니 그건 한 마디로 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국립국악당·통일연수원·남양주종합촬영소 등 설계.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 한국인권재단 후원회장 역임. ▲ 서울생태문화포럼 공동대표.
*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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