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설 연휴에 흰 눈이 왔다. 전국은 지금 설경으로 눈을 뜰 수가 없는 지경이다.
눈 하면 강원도다. 특별히 오늘따라 서울공대 시절 산악부 신입회원으로 눈이 가득했던 강원도에 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강원도 도암면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이곳에 있는 용평 스키장의 모든 슬로프는 인공눈으로 덮여 있고 그래서 설질도 별로 좋지 못한 때가 많았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땅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고, 한번 내린 눈은 가장 오래도록 녹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눈마을이었다. 요즘은 기상 상태가 일정하지 않고 뒤죽박죽일 때도 있다. 그래도 적설량에 관한 한 대관령 횡계마을의 명성은 연조가 오래다.
내가 대관령에 처음 와서 그 맹추위와 적설량에 기절할 만큼 놀랐던 때가 1962년이었으니 나만의 인연과 추억도 60여년이 넘는다.
◇ 한라산 등반…탈진의 추억
경기고 산악부 출신들이 재수생을 합쳐 예닐곱이나 서울공대에 들어갔던 1961년, 그해 겨울에 공대 산악부 선배는 이 만만치 않은 신입생을 환영도 할 겸 기를 꺾어 기강을 잡을 요량이었던 모양이었다. 강원도가 아닌 제주도라니. 그저 설렜다.
예년에 없던 '한라산 적설기 극지법 훈련등반'이라는 제목의 겨울방학 프로그램이 마련된 것도 우리를 설레게 했다.
지금이야 한라산 정상을 하이힐 신고도 오른다고 농담할 정도로 날씨도 따뜻해지고, 눈도 덜 오고, 교통도 좋아졌다.
그 시절 우리는 제주시 아라동 관음사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였는데 바로 그 절 뒤로는 거의 원시림이었고 그 위로는 여름에도 등산객이 많지를 않아 개미목의 대피소까지는 눈이 쌓였을 때는 한나절 거리였다.
그 눈 위에서 스키를 벗으면 내 키로 한길 깊이까지 계속 몸이 빠져들어 가서 스키를 양팔로 잡아 턱걸이하듯이 몸을 빼내어야 할 만큼 눈이 깊었다.
우리는 베이스캠프에서 정상 사이에 세 개의 전진 캠프를 설치하며 스키를 이용해 닷새 만에 정상을 '정복'하고 전원이 동시에 베이스까지 최단 시간에 스키로 철수하는 훈련을 성공리에 마쳤다.
하지만 자칫 일부 대원이 조난할 뻔한 아슬아슬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하산길 짙은 안개 속에 앞사람의 '슈풀'(스키자국)만 따라가다가 방향을 잃고 헤매던 중 탈진한 동료를 부축해 내려오는 코스였다. 나도 그만 지쳐 버려서 그를 전담 선배의 위령비 있는 곳에 버려두고 혼자 내려와 늦은 밤중에 관음사 스님들에게 구조를 부탁했다. 스님들이 횃불을 들고 뛰어나가는 모습만 확인한 채 탈진해 버린 일은 나에게는 오래 잊지 못할 수치였다.
다음 날 '평택호'라는 철선으로 부산까지 야간 항해 20시간을 걸려 돌아왔다. 서울로 가는 일행을 부산역에서 마중하고 대신동 집에 들어가 그 자리에 쓰러져 사흘 밤낮을 계속 잠만 자는 중병을 치렀다.
그 사흘 동안 내 옆에서 걱정스럽게 나를 지켜준 내 여동생이 지금도 많이 생각이 난다. 고3의 몸이라 계속 내 옆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모습이 기억난다. 내가 배고프거나 화장실 가려고 눈을 뜰 때마다 든든하고 다정하고 곁을 지켜줘 푸근하게 느껴졌다. 한라산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하기로 하고, 스키와 용평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다.
우리는 한라산에서 처음으로 스키의 위력과 매력에 흠뻑 빠졌다.
특히 조장희 대장님의 인간적인 매력에 보태어진 '크리스챠니아'(Christiania : 그때는 사활강(斜滑降)을 그렇게 불렀다) 자세는 정말 부드럽고 멋있었다.
◇ 대관령 슬로프 도전기
우리는 다음 해 겨울부터 대관령에 아주 장기적으로 캠프를 차리기로 했다. 눈이 오거나 말거나 무턱대고 거기 가서 눈이 안 오면 눈 오기만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한이 있어도 '겨울이면 대관령'이 무슨 규칙같이 됐다.
당시에는 민박이라는 것도 익숙지를 않아서 그저 어느 한 집을 골라 들어갔다. 주인에게 한겨울을 지내기로 약속하고 불 때는 거며 반찬이며 주인집이 알아서 해주는 대로 지내다 오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었다.
그중 그래도 괜찮은 집이 '중대장 집'이나 '미숙이네 집'이었다. 주인아저씨가 예비군 중대장이었던 그 집은 힘 좋은 아저씨 때문에 장작을 많이 해다 놨다. 겨우내 방바닥이 절절 끓도록 군불을 잘 때여 주는 점이 좋았고, 미숙이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원래 민박 목적으로 지은 집이 아니고, 살던 집의 방을 비워 떡대 같은 학생을 떼거리로 받다 보니 공간이 넉넉할 리 없었다. 대장은 독방, 신입은 여덟 명이 한방에 잔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작은 골방 하나에 평균하여 대여섯 명이 자야 했다.
상급생만 한 방, 하급생만 한방을 쓰는 게 아니고 방마다 상하가 섞여 자는데, 그 작은 방에서도 위치에 서열이 있어서 윗목이 상급, 아랫목이 하급의 차지가 된다.
일단 아랫목에서는 거의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보면 된다. 초저녁에 땐 아름드리 장작불이 새벽이 되도록 윗목까지 따뜻하여지려면 사실 아랫목이란 장판지가 새까맣게 타도록 뜨거워야 하고, 그래서 말은 그럴듯하지, 아랫것들이 아랫목에서 자야 하는 것이다.
잠뿐만이 아니라 하급들은 저녁을 먹고 나서도 아무리 허리, 다리, 종아리가 뻐개질 듯 아파도 쉴 수가 없었다. 형들의 젖은 '워카'(미군용 가죽 군화)에 묻은 물기를 잘 닦아서 아랫목에 나란히 정렬해두고 자야 했다. 그래야 아침에 잘 마르고 따뜻한 신발을 신을 수 있고 하루 종일 발이 시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걸 잊고 바깥에 신발을 내놓고 잤다가는 아침에 얼음덩어리가 된 가죽 워카들은 장작불을 피워서라도 말려 드려야 하는 것이다. 신발만 해도 우리들 것까지 평균 여섯 켤레, 열두 짝을 닦아야 할 뿐 아니라, 하루 종일 눈에 흠뻑 젖은 합판 스키도 물기를 모두 닦아야 했다.
방바닥에 늘어놓아 말린 다음 왁스(또는 보통 불 켜는 초)를 잘 발라 광을 내 두지 않으면 다음 날 하루 종일 스키가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양말이나 내복은 빨아 입을 시간도 없고 빨래할 더운물도 없으니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그냥 입고 신기 마련이라 잠잘 때는 냄새가 고약했다.
특히 말리려고 이불 바닥에 깔고 자는 양말들은 밤새도록 오징어 굽는 냄새를 풍겼다.
그래도 우리는 코를 댕댕 골며 정신 없이들 잠을 잤다. 하루 종일 들판을 누비며 무거운 스키를 어깨에 메고 30분씩 언덕을 기어 올라가 3분 정도를 타고 내려오는 힘든 '노동'이었다.
노동을 끝낸 청년들은 요즘처럼 술을 마시거나 다른 놀이를 할 시간이 없었다. 뜨거워서 도저히 발바닥도 댈 수 없는 온돌방 바닥에 그렇게들 등을 대고 초저녁부터 아침까지 충분히 지져야 하루 종일 지친 근육들이 아침에는 말끔히 풀렸다.
그러나 아침에는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 시골집에 하나 밖엔 있을 턱이 없는 야외 변소에 20여 명 청년들이 서로 순서를 다퉜다. 말하자면 그거야 정말 전쟁이랄 수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광경이 매일 아침 그 마당에서 벌어졌다.
그러고는 드디어 내 차례가 와서 거기 들어가 바지를 내리고 널빤지 위에 꿇어앉았다. 영하 10도, 체감으로는 영하 20도의 대관령 칼바람이 엉덩이를 할퀴듯 얼어붙게 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로 내 엉덩이를 찌를 듯이 날카롭게 솟아오른 거대한 피라미드가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하여튼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무사히 '볼일'을 마친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 보면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계속)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국립국악당·통일연수원·남양주종합촬영소 등 설계.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 한국인권재단 후원회장 역임. ▲ 서울생태문화포럼 공동대표.
*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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