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오징어 게임'에서 성기훈(이정재)은 딱 한 번 악행을 저지른다. 홀짝을 맞혀 구슬을 빼앗는 게임에서 오일남(오영수)을 속인다. 치매라는 약점을 계속 파고든다. 그는 게임에서 우승하고 후회한다. 상금에 손도 대지 않고 폐인처럼 지낸다.
죄의식은 인지부조화라는 예외적 상황에서 발생한다. 인지부조화란 신념과 행동 사이, 또는 견해 사이에 계속 모순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성기훈은 착한 사람이지만 게임에서 이기려면 다른 이들을 밟고 넘어서야 했다.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나 뒤늦게 오일남을 만나 불균형 상태를 일부 해소한다.
성기훈과 달리 조상우(박해수)는 인지부조화를 곧잘 피한다. 스스로 명분을 찾고 그것을 믿는다. 강새벽(정호연)을 살해하고 "어차피 그냥 놔뒀어도 죽을 애였다"며 자기합리화를 한다. 유리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에선 유리 공장에서 일했던 참가자를 아래로 떠밀어 위기를 모면한다.
성기훈은 "넌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거야. 그게 나였어도 밀었을 거냐?"라고 따져 묻는다. 조상우는 분노하며 일갈한다. "기훈이 형! 형 인생이 왜 그 모양 그 꼴인지 알아? 지금 이 상황에도 그런 한심한 질문이나 하고 자빠졌으니까!" 질문은 인지부조화의 전형적 반응이다. 상대에게 자신의 패배자 같은 모습을 투사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는 일반 도덕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더 우월하다고 믿는 규칙이나 도덕에 따라 행동하면 '자기 면책'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 불의에 항거한다는 명목으로 정해진 규범을 초월해 위법을 정당화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책임 회피'도 자기 면책 못잖게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는 도구가 된다고 했다. '저 사람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명령에 따랐을 뿐이야' 같은 항변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기자회견에선 두 가지를 모두 엿볼 수 있었다. 최근 논란에 대해 거듭 "법적으로는 문제없다"고 했다. 사과하면서 잘못에 대한 설명도 애써 피했다. 그저 법의 논리만 앞세웠다. 검사 출신답게 집권 초기부터 내세워온 도구다. 불법, 국기문란 등에 단호한 대응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적 위기를 맞으면서부터 소극적 방어 수단으로 퇴색했다.
어쩌면 민심이 돌아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윤 대통령은 발목 잡히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법의 논리를 우선시했다. 특히 배우자의 명품 가방 수수나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법 적용의 형식적 요건을 따지기 바빴다. 대통령 취임식 전날 녹음된 명태균 씨와의 통화 내용이 공개됐을 때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법의 논리는 모두에게 중요하다. 하지만 그 세계에만 안주해선 효과적인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성기훈은 그 경계를 넘을 용기가 있었다. 우승 일보 직전에 게임까지 포기한다. "동의서 제3항. 참가자 과반수가 동의하면 게임은 중단된다. 우리 두 사람이 포기하면 여기서 끝나는 거야." 그에겐 상금보다 어린 시절 함께 놀던 동생이 중요했다. 자기 면책이나 책임 회피 없던 순수한 시절이.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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