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윤석열 대통령도 믿었다는 우리나라 부정선거론 주장 같지만, 사실 이것은 지난해 일본의 총선거, 현 지사 선거 당시 유튜브 채널을 타고 확산됐던 부정선거론의 일부를 갈무리한 것이다. 우리나라 극우 정치 성향 유튜버들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1일 직접 출석한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계엄을 선포하기 전 여러가지 선거의 공정성 신뢰에 의문이 드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며 부정선거론을 쟁점화했다. 미국에서도 유튜브를 타고 번진 부정선거론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정치적 쟁점으로 남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식 연설에서 그가 패배했던 2020년 선거에 대해 “완전히 조작됐다”며 부정선거론에 힘을 실었다.
부정선거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 제기된 것이 아니다. 2002년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2.3%포인트 차이로 이겨 당선됐던 16대 대선때도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개표 부정과 재검표에 대한 목소리가 나왔다. 이후 부정선거론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스피커는 현재 유튜브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을 진행하는 방송인 김어준씨다. 김씨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3.5%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던 18대 대선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전자 개표기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거나, 투표지 분류기가 미분류로 판정해 수개표한 박 후보의 표 비율이 문 후보보다 1.5배 높다는 의미로 'K값 1.5'라는 주장도 내세웠다. ‘K값’은 후보 사이에 '1:1'이 나와야 정상인데 '1:1.5'의 비율이 나타났으니 누군가 이를 조작했다는 주장이다.
김씨는 당시 이 주장을 입증하겠다며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제작했다. 그는 당시 시사회에서 "음모론 수준에서 문제를 제기하려고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여러 움직임이 일어났다.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서 네티즌 20만여명이 재개표를 해달라는 청원에 서명하기도 했고, 선거관리위원회에 해명을 요구하는 단체도 나왔다. 모의실험까지 진행하며 선관위가 부정선거론을 반박했지만, 믿을 수 없다는 비판이 계속해서 나왔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양상이다.
미국도 트럼프 취임과 함께 부정선거론이 다시 쟁점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일(현지시간) 취임식에서 "이번 대선은 캘리포니아에서 훌륭한 결과를 냈지만, 문제는 그들이 3800만개의 투표용지를 어디로 보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라고 재차 부정선거론을 들먹였다. 자신이 낙선했던 2020년 대선을 가리켜 “완전히 조작된 선거”라고 표현했고 “첫번째 선거(2016년 대선)보다 훨씬 더 많은 표를 얻었지만, 그들은 우리가 졌다고 했다”며 부정선거 논리를 이어갔다.
미국에서도 부정선거론은 유튜브나 X(옛 트위터) 등 SNS를 중심으로 확산된다. 실제로 지난해 11월에 열린 미국 대선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잇달아 나왔다. 먼저 유튜브와 X를 중심으로 펜실베이니아 주 공무원들이 펜실베이니아주를 비롯해 조지아, 애리조나 등 5곳에서 교도관들이 수감자 투표를 조작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테러 가능성이 있으니 유권자들에게 '투표하지 말고 집에 머무르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는 영상도 퍼졌다. 당시 FBI가 나서서 해당 영상이 가짜라고 주장했지만, '가짜 영상'은 SNS에서 끊임없이 공유되며 지지층을 끌어모았다.
X에는 본인을 캐나다인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투표용지 사진과 함께 "국경을 넘어 투표하러 왔다"고 쓴 글이 게시되기도 했고, 이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튜브를 타고 공유되며 공분을 샀다. 여기에 조지아에 도착한 아이티인들이 투표하는 장면이라는 영상까지 올라와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들이 투표에 불법 개입하고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모두 개인이 연출한 가짜 영상과 사진이었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3월 치러진 구마모토현 지사 선거, 같은 해 7월 도쿄도지사 선거, 10월 중의원 선거 등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와 관련된 의혹이 나왔다. 우리나라 사전투표제도와 같은 '기일 전 투표'에서는 투표함을 미리 바꿔치기한다는 주장이 유튜브와 SNS에 퍼져, 일본 선관위는 "CCTV도 있고, 개봉하게 된다면 뜯긴 티가 나도록 테이프로 봉인한다. 심지어 한번 운반할 때 부정선거의 가능성을 일축하기 위해 반드시 복수의 직원이 함께 이동한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의 부정선거론은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모든 진영에서 제기된다는 점이다. 진보 진영에서 오랫동안 제기했던 것은 개표기에 대한 신뢰도 문제다. 일본에서 개표기를 만드는 회사인 '무사시'의 최대주주가 고(故)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라며 자민당에 유리하도록 선거 결과가 계속해서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아베 전 총리를 비롯해 자민당 1당 독주 체재가 오랫동안 유지돼왔던 일본의 정치 특성,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 진영 지지자들의 불만이 부정선거론을 만들어냈다.
보수 진영 유튜버들은 특정 지역의 유권자 정치 특색이 부정선거로 연결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진보 성향 유권자가 많은 오키나와를 두고 '공직선거법 위반 부정행위가 만연한 부정선거 특구'라고 일컫는가 하면 "부정행위는 항상 발생하는데 오키나와 언론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음모론을 제기했다.
유튜브와 SNS 보편화로 소통하는데 국경이 허물어지면서 부정선거론을 신봉하는 사람들끼리 국적과 상관없이 뭉치게 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당시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청사에서 한미 군 당국이 중국인 간첩 99명을 체포했다는 '가짜뉴스'가 퍼진 것과 관련해 X의 일본인 사용자들도 '선거연수원에서 잡힌 중국인 99명이 오키나와 미군 부대 시설에서 조사받았다'라는 내용을 공유했다. 이들은 "한국의 부정선거가 진짜라는 것이 밝혀지면 일본의 부정선거도 단순한 음모론이 아닌 것이 될 것"이라며 연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선거 때마다 고개를 드는 부정선거론은 유튜버들이 선동하는 과격 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서부지법과 헌법재판소에서 발생한 난동 사태로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 지지 시위대 가운데 극우 성향 유튜버들이 포함된 것처럼 미국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뉴욕타임즈가 진보성향 미디어 감시단체 미디어매터스와 인기있는 미국의 우파 유튜브 채널 1~30위를 조사한 결과, 이들은 부정선거와 관련해 286개의 영상을 개시했으며 영상들의 총 조회수는 4700만건 이상을 기록했다. 주장이 확산되면서 조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 당선인으로 확정된 2021년 1월, 트럼프 지지자들은 부정선거를 외치며 워싱턴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다. 체포 인원만 700여명이 넘고 시위대가 경찰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진압 과정에서 의회 소속 경찰이 사망하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전략적으로 유튜브를 이용하고 있다. 미국 공영매체 NPR은 '트럼프의 인플루언서 투어는 어떻게 승리에 도움을 주었는가'라는 기사를 통해 "트럼프는 이번 재선을 위해 틱톡, 팟캐스트, 유튜브에 많이 출연했었다. 인플루언서와 트럼프의 대화를 통해 현안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강조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2023년 1월 하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로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브라질 의회에 이어 대법원, 대통령 집무실까지 점거했다. 2023년 5월에는 미국과 브라질에 이어 파라과이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극우 성향의 파라과요 쿠바스 국가십자군당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 역시 전자투표에서 부정행위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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