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앞서 투수와 타자는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투수 포수의 사인 교환에 시간이 걸렸고, 타자는 타임을 걸고 타석을 벗어납니다.
투수도 발을 투수판에서 풀고, 새로 사인을 주고받습니다.
각자의 투구 템포, 타격 리듬이 너무 달랐습니다.
이런 장면이 몇 번 반복됩니다.
자기 타이밍을 잃지 않으려는 의도인데 어느새 기싸움이 돼 버렸습니다.분위기가 묘해집니다.
투수는 타자를 땅볼로 처리한 뒤 그를 향해 영어로 "get in the box(타석에 들어가)"라고 소리칩니다.
앞서 상황에 짜증이 났던 걸 말로 던진 겁니다.
타자도 그 말을 듣고 화를 크게 내고 언성을 높여 대응합니다.
결국 양 팀의 벤치 클리어링으로 번졌습니다.2015년 5월 마산구장에서 열린 NC 다이노스-두산 베어스의 경기 때 일입니다.
다음날 당사자인 둘을 포함, 양 팀 선수들은 화해의 악수를 했고 웃으며 헤어졌습니다.
당시 NC의 운영팀장으로서 두 팀을 오가며 입장과 해명을 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정도 해프닝은 긴장감 넘치는 경기, 승부욕 넘치는 선수에게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 생각은 비슷합니다.
예고 없이 발생하는 상황은 개인이나 팀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주며 개성과 조직력 등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당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것 중에 일부 표현에 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NC 투수가 'box(타석)'라고 한 부분을 다른 누군가가 "관(棺, 장례 때 사용하는 관)에 들어가라는 말 아니냐"라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불붙기 시작한 상황이 폭발했다는 겁니다.
그때 이런 부분까지 당사자 의견을 확인하며 더는 상황을 왜곡하지 않도록 두 팀 프런트가 애를 썼습니다.
저는 야구장에서 배터스 박스(batter’s box, 타석)을 볼 때면 그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지금 저기 그려진 박스는 무슨 뜻일까 생각하곤 합니다.
자신의 리듬과 집중력을 모으는 공간일 겁니다.
타자들이 타석에 들어서며 저마다 리추얼이나 루틴 동작을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네모난 경계선을 넘어 상자 속에 들어오는 순간 자기 몸과 마음의 상태를 새로 규정하는 의식과 동작을 하는 겁니다.
실제로 어떤 타자들은 경기 중 타석에서 깊이 집중하다 보면 관중석의 여러 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삼성에서 키움으로 옮긴 외국인 타자 루벤 카디네스가 최근 언론 인터뷰에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응원이나 야유에) 신경 쓰지 않는다.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도 비슷합니다.
타석이란 공간이 상태를 전환시키며 경계를 나누는 걸 알 수 있습니다.그런데 상자 안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는 경우도 생깁니다.
상대를 의심하거나 불만스러울 때 자기 확신에 빠지게 됩니다.
에피소드로 인용한 경기 중 해프닝처럼 말입니다.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충분히 상황을 관찰하지 못해 시야가 좁아지고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는 겁니다.심리 상담에서도 상자(box)를 이용해 마음속 감정을 헤아려 보기도 합니다.
상자는 사고방식의 틀이기도 하고, 개인의 문제나 감정을 담아두는 저장소입니다.
실제로 작은 상자에 여러 감정 단어를 적은 카드를 넣어둔 뒤 골라서 설명하게 하는 방법을 씁니다.
잘 정리돼 있는 줄 알았던 나의 상자는 뒤죽박죽입니다.
잘 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상자 속 저편에 숨겨진 고정 관념이나 감정적 장애물이 드러납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손을 찔린 듯 놀라기도 합니다.
상자 속에 묻어 두는 것만이 최선이 아님도 알게 됩니다.
남에게 보여주는 건 더욱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가둔 상자에서 벗어나 보라"는 메시지를 깨닫습니다.여러분 마음속의 타석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요.
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 김종문 coachjmoon@지메일닷컴 김종문은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2011~2021년 NC 다이노스 야구단 프런트로 활동했다.
2018년 말 '꼴찌'팀 단장을 맡아 2년 뒤 창단 첫 우승팀으로 이끌었다.
현재 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KPC)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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