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이코노미뉴스 김국헌] 중국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 돌격하고 있다. 심각한 경제 불황으로 중국 내수 경기가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는 가운데 중국 기업들의 과잉생산이 지속되면서 가장 가까운 한국 시장이 타깃이 되고 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수출 뿐만 아니라 직접 생산기지를 한국에 세우려는 모습도 관측된다. 더 큰 문제는 자동차, 가전, 철강, 조선, 석유화학, 게임, 유통 등 거의 전 산업영역에서 한국 내수시장이 중국의 타깃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이코노미뉴스는 신년을 맞아 중국의 강력한 돌격에 위기를 맞이한 한국 산업 전반의 위기를 집중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중국 가전사들 집요한 한국시장 공세에 슬슬 구멍 뚫려
중국 브랜드가 국내 가전시장에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한국 시장은 삼성전자, LG전자의 존재로 인해 외국산 가전제품의 무덤으로 불렸지만 중국의 집요한 공세가 이어져 왔다. 삼성과 LG의 안방인 한국의 로봇청소기 시장을 장악한 데 이어 TV·냉장고·에어컨 등 대형 가전 시장까지 속속 진출하고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를 보던 과거와 달리 품질을 앞세워 프리미엄 시장에서도 존재감을 공고히하는 모습이다. 최근 들어서는 고질적 약점이던 AS를 강화하고, 아예 한국 지점을 설립하며, 쿠팡 등 거대 판매루트를 활용하는 등 한국 가전시장 공략에 고삐를 죄는 분위기다.
중국산 가전제품 수입은 꾸준히 증가 추세다. 무역통계에 따르면 올 들어 10월까지 중국산 가정용 전자제품 수입액은 41억57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 늘었다.
이 기간 우리나라의 전체 가전 수입이 69억7800만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중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60%로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이다. 중국산 가전이 과거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물량 공세에 가까웠다면 최근 들어서는 첨단 기술까지 접목해 한국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던 중국은 2000년대 들어 기술 자립을 꿈꾸며 정부 주도의 대대적인 R&D 투자를 시작했다. 2000년에 896억 위안(약 16조5700억원)을 투입했으며, 이후 2010년 7063억 위안(약 130조원) 2020년에는 2조5천억 위안(약 462조)으로 늘었다.
추가로 중국 가전 기업들은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단기간에 기술 개발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이얼은 제너럴일렉트릭(GE) 가전사업부, 뉴질랜드 피셔&파이클, 이탈리아 캔디를 인수합병했고, 하이센스는 도시바 TV사업부와 유럽 가전업체 고렌예, 자동차용 에어컨업체 샌든홀딩스를 사들였다. 여기에 14억이라는 세계 최대 내수시장은 중국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이렇게 성장한 중국 가전기업들은 삼성, LG가 버티고 있는 한국 내수시장 공략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중국 로봇청소기 업체 '로보락' 국내 시장 1위...TCL 국내 TV 시장에서 영향력 커져
중국 가전업체들 중 한국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인 회사는 로봇청소기 업체 '로보락'이다.
로보락은 국내 출시 2년 만인 2023년 한국시장 1위를 차지했다. 로보락의 한국 매출규모는 2020년 291억원, 2021년 480억원, 2022년 1000억원, 2023년 2000억원 등 가파르게 성장해왔다. 올해 상반기 한국 매출은 1420억원으로 삼성전자와 LG전자를 제치고 3년째 매출 1위를 차지했다. 한국 로봇청소기 시장 점유율은 2022년 30% 수준에서 2024년 상반기 46.5%까지 상승했다.
이처럼 로보락이 국내 시장을 점령한 이유는 가격이 단순히 저렴해서가 아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최상위 라인보다 오히려 가격이 비싸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다. 150만대의 하이엔드(최고급) 시장에서는 80.5%로 압도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로보락의 로봇청소기는 먼지 흡입 기능과 물걸레 청소 기능이 함께 장착돼 있고 청소를 마치면 걸레를 세척·건조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국내 브랜드 제품보다 청소 기능이 뛰어난데다 관리 방법도 간편해 소비자 호평을 받고 있다.
로보락의 한국 공략 야심은 로봇청소기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로보락은 로보락은 지난해 말 일체형 세탁건조기를 국내에 출시하며 판매제품군 확장에 나섰다.
첸 강 로보락 CEO는 지난 1월 7일 CES 2025에서 “중국산 제품이 저렴하고 품질이 낮다는 인식이 바뀌고 있다”며 "로보락이 고정관념을 재정의하는 데 기여했다”고 자평했다. 또 “로보락은 높은 품질과 혁신 기술을 바탕으로 한국 소비자에게 신뢰받는 브랜드로 자리잡았고 중국 브랜드도 기술, 신뢰성, 디자인에서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로보락의 성공에 힘입어 에코백스, 드리미와 같은 중국산 로봇청소기까지 안방 시장 공략에 이미 나선 상황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국내 진공청소기 수입에서 중국은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다. 2023년 수입된 전체 진공청소기의 63%, 로봇청소기의 91%가 중국산으로 집계됐다.
국내 TV 시장에서는 중국 TV 업체인 TCL의 공세가 거세다.
한국에서 TCL TV에 관심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주로 국내 온라인 채널을 통해 판매되지만 말도 안 되는 가격, 그리고 그 가격보다 말도 안 되는 대화면을 무기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끄는 중이다. 과거에는 중국산을 질 낮은 제품으로 깔봤지만 스마트폰과 로봇청소기 등 중국산 가전제품이 가성비로 인기를 끄는데다 국산 대비 반값에 불과해 TV도 중국산에 대한 거부감이 나날이 옅어지고 있다.
중국산 TV 중에서는 TCL이, 그리고 TCL 제품 중 특히 인기 있는 제품은 85인치(215cm)~98인치(248cm) 크기 대화면 모델이다. 화면이 커질수록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80인치 이상 대화면 제품은 구매장벽이 높다.
TCL은 100인치에 가까운(98인치) 제품의 실 구매가격이 200만원대 중반에 불과하다. 같은 크기의 삼성·LG전자 제품이 400만원대이니 체감상 '반값TV'인 셈이다.특히 TCL의 ‘C845’ 시리즈의 경우 쿠팡 첫 출시 당시 55인치부터 85인치까지 전 제품이 품절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최근 TCL은 가격과 기술력을 앞세워 국내시장을 공략 중이다. LG와 삼성으로 안목이 높은 국내 소비자들을 잡기 위해 대형 TV, 퀀텀닷 미니 발광 다이오(QD-Mini LED) 등 프리미엄 제품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고가의 대형 TV를 구매하기 부담스러운 1인 가구나 게임, OTT, 홈트 등의 용도로 세컨드 TV를 구매하려는 고객층에게는 중국 브랜드 LCD TV가 가장 훌륭한 선택지가 된다.
TCL은 TV 단일 품목에서 에어컨과 제습기, 냉장고 등으로 제품군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TCL의 성과를 등에 업고 하이센스 등 또 다른 중국 TV업체들이 중저가에서 프리미엄 라인업을 늘리고 있다.
중국 가전기업들, 국내 지사 세우고 AS 개선 중
중국 가전업체들은 국내 지사를 세우고, 고질적 약점이던 중국산 브랜드 이미지 개선과 사후관리(AS)를 강화하고 있다. 그동안 제품 판매에만 주력했다면 이제 브랜드와 고객 관리를 통한 재구매에 중점을 두기 위해 법인까지 두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중국 샤오미는 한국 지사인 샤오미테크놀로지코리아를 설립하고 업무를 시작했다. 또한 오는 15일 첫 기자간담회를 통해 TV, 로봇 청소기, 스마트폰, 웨어러블 기기 등의 제품을 공개하며 상반기 중 서울에서 오프라인 매장도 열 계획이다.
TCL은 이미 2023년 11월 한국 법인을 설립했으며, 하이얼과 하이센스도 쿠팡에 입점해 TV를 판매하면서 AS까지 제공하고 있다. 로보락의 경우 유통사인 팅크웨어(아이나비)와 한의코퍼레이션이 AS 책임을 맡고 있다. 2위 업체인 에코백스는 나이스엔지니어링, 드리미는 총판업체인 코오롱글로벌을 통해 AS를 제공하고 있다.
로보락은 2024년 롯데하이마트와 제휴해 AS 접수 지점을 기존 18개에서 352개까지 확대했다. 이곳에서 접수한 제품을 AS센터로 배송해 수리하는 방식이다. 에코백스는 서비스본부를 30개에서 36개까지 늘렸고 드리미도 기존 23개 AS 지점을 25개까지 확대했다.
중국 가전업체들 한국시장 공략 한계점 '분명'...하지만 "방심 금물"
이같은 중국 가전업체들의 한국 시장 공략은 분명 위협적이다. 하지만 여전한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가장 큰 한계는 중국 브랜드에 대한 한국 고객들의 불신이다. 현재 한국은 코로나 펜데믹과 정치적 이슈로 인해 중국의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다. 한국에서 프리미엄 제품이 되려면 아이폰과 같이 브랜드에 대한 고객 충성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중국산 제품은 '가성비'로 선택될 뿐이지 아직 한국 프리미엄 시장에서 주류로 통한다고 볼 수 없다. 낮은 브랜드 이미지와 중국산이라는 한계는 계속 중국 가전업체들의 발목을 잡을 전망이다.
AS 책임이 제조사에 없다는 근본적 이유 때문에 여러 불편이 야기되는 것도 여전하다. 무엇보다 제품 라인별로 판매하는 유통사가 다르면 수리 창구의 일원화가 어렵다. 서비스의 지속성과 안정성도 떨어진다. 수리 외주를 맡는 업체가 다른 산업 제품이나 외산가전 수리도 담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리 방법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다.
중국 가전업체들이 접수지점 확대나 방문수거 형태로 AS 망을 확대하고 있지만 AS거점 자체를 늘리기보다는 대부분 한정된 개수의 AS센터에 물건을 배송해 제품을 수리하는 방식이어서 본사 차원의 철저한 고객관리도 어려운 구조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중국산 로봇청소기, TV 등 중국산 성공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냉장고, 세탁기 등 메인 프리미엄 시장까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여러 중국기업들이 품목과 품질, AS를 확대하고 한국시장을 노리고 있지만 다른 제품들까지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가전업체들이 AS를 대폭 강화하고 있고, 낮은 브랜드 이미지에도 불구 로보락이 한국 로봇 청소기 시장을 접수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안심은 절대 금물이다.
삼성, LG 등 국내 기업들 역시 중국 가전업체들의 한국 시장 진출을 위협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중국이 그간 저가 물량 공세를 통해 시장의 점유율을 넓혀왔지만 최근에는 단순 가격 경쟁력뿐만 아니라 품질까지 끌어올리면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판단한다.
국내 기업들은 AI 기능 고도화와 제품간 연결성을 통해 중국산 브랜드와 차별화한다는 전략이다. 또 가전제품 라인업 다변화와 구독형 가전 확대를 추진한다.
LG전자는 올해 LCD TV 라인업을 강화한다. 기존 OLED TV와 투트랙 전략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이와 동시에 핵심 기술력을 바탕으로 볼륨존 모델도 강화한다. 삼성전자도 초대형과 프리미엄 TV 라인업을 확장해 점유율 수성에 나선다.
고가의 가전 제품을 구독 형태로 구매할 수 있어 소비자들의 진입 장벽을 대폭 낮춘 가전 구독 서비스 등도 안방 시장을 지키는 한 가지 전략이다. 양사 모두 TV와 로봇청소기 등을 가전구독 상품에 탑재해 서비스하고 있다.
결국 국내기업들은 안방에서 중국에 시장점유율을 넘겨주지 않으려면 또 다른 초격차를 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삼성전자는 AI 기술과 스마트싱스로 연결성을 강화, 다양해진 주거 형태와 라이프스타일에 개인화된 AI 경험을 할 수 있는 '홈(Home) AI'를 통해 초격차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다.
LG전자는 가전 중심으로 이어온 기존 사업을 모빌리티, 상업용 공간 등으로 확대하고 수십여년간 쌓아온 고객에 대한 이해와 노하우를 활용해 스마트 라이프 솔루션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 중장기적 목표다.
심우중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국내업체들이 AI(인공지능)를 활용한 제품 혁신과 국내 생산을 확대해야 하고, 스마트홈 서비스 개발∙운영 등의 밸류 체인 부문을 국내에서 담당하여 국내 부가가치를 제고해야 할 것”이라며 “가정용 로봇, 개인맞춤형 기기 등 신제품 시장을 개척하고 글로벌 스마트홈 플랫폼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산 전자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소비자 입장에서는 편리한 일이지만 이는 결국 중국 전자산업에 우리가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도 내수에서는 '궈차오(애국 소비)'를 한다. 중국 기업이 대놓고 한국 시장을 노리는 상황에서 가성비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 가전산업의 발전을 위해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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