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셰일 혁명 이후 미국은 세계 1위 산유국이자 원유 수출국이다. 미국 안에 충분한 기름이 있고, 쓰다 남은 것은 다른 나라에 수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미국은 여전히 많은 기름을 캐나다에서 수입하고 있다. 캐나다산 원유 수입에 문제가 생기면 연료부터 플라스틱까지 다양한 석유화학제품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을 정도다. 미국이 캐나다산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면서도 원유 등 에너지에는 10%만 부과하기로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북미지역 원유 채굴 지대를 가로지르는 석유·가스 파이프라인은 미국 뿐 아니라 캐나다와 알래스카, 중남미의 멕시코까지 연결돼 있다. 미국은 2010년대 셰일 혁명 이후에도 매 년 1000억달러(약 145조원) 이상의 원유를 캐나다, 멕시코에서 수입해 왔다. 미국 연료·석유화학 제조협회(AFPM)는 지난해 기준 미국의 수입 원유 60%가 캐나다, 7%는 멕시코에서 왔다고 집계한다. 미국 경제의 '젖줄' 역할을 하는 석유·가스 파이프는 지금도 캐나다 서쪽과 멕시코 북쪽으로 끊임없이 확장 중이다.
왜 산유국인 미국이 캐나다산 기름에 의존할까. 원유의 성질에 그 답이 있다. 원유는 점도와 냄새로 종류를 구분한다. 점성이 높아질수록 '경질유'에서 '중질유'로 구분되며, 냄새가 고약할수록(황 함유량이 많다는 뜻) '저황'에서 '고황'으로 구분된다.
미국산 셰일유는 점도도 낮고 냄새가 산뜻한 '경질 저황유', 즉 'light sweet(라이트 스윗)' 성질을 가진다. 반대로 캐나다산은 점도가 높고 냄새도 심한 '중질 고황유', 즉 'heavy sour(헤비 사워)'다.
미국산 셰일유는 연료나 화학제품으로 재가공하기에 좋아 미국 정유 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하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경질 저황유는 아직 중질 고황유보다 공급량이 부족하며 그만큼 비싼 편이다.
정제 설비의 문제도 있다. 원유 정제 공장은 각각 경질유, 중질유에 따라 서로 다른 부품, 설계를 지닌다. 셰일 혁명 이전엔 중질유가 경질유보다 훨씬 구하기 쉬웠으므로, 미국의 화학 산단도 대부분 중질유 정제에 특화됐다.
이 때문에 미국의 텍사스 정유 산단은 많은 중질유 정유 클러스터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클러스터는 미래에도 미국 제조업의 중추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끌어온 원유는 디젤유와 제트 연료로 가공되는데, 해당 기름은 트럭과 항공 운송 비중이 높은 미국 경제의 혈액이나 다름없다.
정유 공장 특성상 중질유 공장을 철거하고 경질유 공장으로 바꾸기도 쉽지 않다.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 수십조원대의 추가 비용을 야기한다. 중질유 정제 공장을 경질유 공장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기름의 가격 경쟁력이 훼손될 우려도 있다. 생산 원가가 올라가면 중국산 저가 공산품과 출혈 경쟁 중인 미국 화학업계에도 달갑지 않은 소식이 될 것이다.
미국의 정유 산업은 미국산 셰일유와 캐나다·멕시코산 원유를 혼합해 가동됐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경쟁력을 얻을 수 있었다. AFPM도 지난달 발표한 관세 정책 입장문에서 "정유 산업은 서로 다른 원유를 혼합해 최대치의 생산 효율을 발휘해야만 한다"며 "미국 정유산업의 70% 이상이 (셰일이 아닌) 중질유에 의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관세는 쌍방향으로 작동한다. 이달 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행정부는 캐나다산 공산품에 25%, 원유 등 에너지 제품에 10%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가, 3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의 전화 통화 후 실제 부과를 30일 유예하는 데 합의했다. 에너지 관세는 캐나다에 펼쳐진 파이프를 타고 북미로 흘러드는 중질유, 일명 '웨스턴 캐네디언 셀렉트(Western Canadian Select·WCS)'를 겨냥한 조처다. 캐나다 측은 즉각 보복 관세를 발표했다. 다만 관세 대상에 에너지를 포함하지는 않았다.
관세 부과 조치가 30일 연기됐을 뿐, 아직 상황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언제든 관세와 보복 관세 조처로 미국산, 캐나다산 원유 모두 십자포화를 당할 수 있다. 수십년간 미국, 캐나다, 멕시코 기업인과 혁신가들이 공조해 만들어낸 초대형 에너지 공급망이 와해될 위기에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AFPM은 "비직관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원유 수입 관세는 소비자와 제조업체에 대한 비용을 높이고 에너지 안보까지 위협한다"며 "단순히 미국 원유 생산을 늘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경질유는 캐나다 중질유를 대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갑작스러운 지각변동을 맞이한 북미 정유 산업은 아시아, 특히 한국 화학 산업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이미 한국은 미국산 원유 핵심 수입국이다. 지난해 기준 2151만톤(t)을 수입해 사우디아라비아(4789만t) 다음인 2위를 기록했으며, 수입 원유 비중 15.7%를 차지했다.
일각에서는 한국 정유업계가 관세 전쟁을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 여수 국가 산단 내 중화학 클러스터는 WCS 같은 중질유 정제에 특화됐다. 캐나다의 미국 수출용 WCS가 아시아로 선회하면 우리 입장에선 새로운 원유 수급처를 얻는 셈이다.
도춘호 한국화학전문가 협회장은 "우리 화학 산업은 수입한 중질유를 정제해 아스팔트 등 석유화학제품으로 만들어 재수출하는 구조였다. 최근엔 크래킹(원유를 열로 재가공하는 공법) 기술이 발달하면서 휘발유 같은 고급 연료도 정제할 수 있게 됐다"라며 "(캐나다산 원유가 있다면)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협소한 캐나다의 수출 인프라는 장애물이다. 캐나다는 서부의 'TMX 파이프라인'을 통해 원유를 해외로 운송한다. 아시아로 향하는 원유는 하루 평균 60만배럴의 전체 원유 중 약 30%에 불과한 18만배럴 수준이다. 한국 일일 소비량(대한석유협회 집계 약 306만배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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