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자, 중국 당국도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산 수입품에 보복 관세를 책정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은 '신뢰할 수 없는 기업(중국판 블랙리스트)' 명단에 미국 기업 '일루미나'를 추가했습니다.
일루미나는 유전체 분석 장비를 만드는 생명공학업체로, 연 매출 40억달러(약 5조8000억원) 안팎의 회사입니다. 유전체 분석 시장에선 세계 최대의 기업이지만,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빅테크와는 거리가 먼 기업이지요. 하지만 유전공학이 최근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면서 유전체 기업은 미중 경쟁의 새로운 전선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유전체 분석은 생물의 염기서열을 전자적으로 분석해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뜻합니다. 이 작업을 수행하는 도구를 보통 유전체 분석기, 줄여서 '시퀀서(Sequencer)'라고 합니다. 디지털화한 DNA 정보를 통해 과학자들은 신종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추적하거나, 환자의 희귀 질환 발현 가능성 유무를 따질 수 있습니다.
아직 유전체 분석은 시장보다는 과학 연구 영역에 더 가깝습니다. 시퀀서는 정부 보건 당국이나 기업 연구소, 일부 대형 병원을 주 고객으로 삼고 있지요. 지난해 44억달러(약 6조37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일루미나는 글로벌 시퀀서 업계의 최대 업체입니다.
중국은 이 회사를 '신뢰할 수 없는 기업', 즉 중국 내에서 영업 활동을 할 때 앞으로 다양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기업으로 올렸습니다. 중국판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린 셈입니다. 하지만 사실 미국과 중국의 '시퀀서 갈등'은 훨씬 오래전부터 벌어졌습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시절인 2023년 3월 미국 정부도 중국 시퀀서 제조업체인 MGI의 해외 법인 BGI를 블랙리스트에 올렸거든요.
시퀀서는 실험실에서나 쓰이는 장비이지만, 그 전략적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 세계를 통틀어 시퀀서를 만들 과학적 역량을 가진 국가는 한 손에 꼽습니다. 일루미나 장비는 미국과 영국에서 개발됩니다. 애초 영국의 '솔렉사'라는 시퀀서 업체를 인수해 탄생한 게 현재의 일루미나 시퀀서입니다. 중국에선 MGI와 BGI가 내수 시장을 사실상 독점합니다.
이 외에 미국 과학 장비 기업 서모피셔의 자회사인 이온 토렌트나 퍼시픽바이오사이언스(PACBIO), 영국 옥스퍼드 나노포어 테크놀로지스(ONT) 등 극히 소수의 스타트업이 있습니다. 즉, 미·중·영 3강 구도가 이미 굳혀진 영역이란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정부 유전체 공공사업에 쓰이는 설비도 전량 해외 시퀀서에 의존합니다.
시퀀서의 힘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가장 잘 드러났습니다. 화이자-바이오엔테크,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등이 개발되고 난 뒤로도 수많은 변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출몰하며 유행을 이어갔는데, 이때 바이러스의 유전체를 스캐닝해 변종들을 실시간 '추적'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차세대 시퀀서의 공입니다. 한 생물의 유전체 전체를 단 수 시간 만에 해독하는 '전장유전체시퀀싱(WGS)' 기술을 이용했지요.
앞으로 수많은 생명공학 영역에서 시퀀서는 필수재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백신으로 활약한 메신저RNA(mRNA) 백신의 경우, 백신 안에 담긴 RNA 물질이 워낙 취약해 제조 과정 중 RNA의 변질 여부를 파악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차세대 시퀀서는 DNA뿐만 아니라 RNA 분석도 가능해 백신 물질의 '품질 검증기'로 쓰일 수 있습니다.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의 DNA를 편집해 더욱 효율적인 연료나 생분해 플라스틱을 만드는 합성 생물학, WGS로 사람의 유전체를 분석해 수십 종류 암을 진단하는 액체 생검 등 차세대 진단 기술도 시퀀서를 통해 이뤄집니다. 흔히 반도체를 전자공학의 쌀에 비유하곤 하는데, 머지않아 시퀀서는 보건·제약·생명공학·과학 연구 전체를 아우르는 산업의 필수재로 등극할 잠재력이 있습니다. 미중 기술 경쟁의 불씨가 반도체에서 시퀀서로 옮겨붙을 가능성은 충분한 셈입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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