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발자 뤄푸리(羅福莉)에 대한 소식도 여럿 나왔죠. 위 세 문장은 뤄푸리를 수식한 언론의 표현입니다.
어린 여성이 학문이나 산업 등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 우리는 종종 ‘천재 소녀’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합니다. 오직 칭찬을 위한 의도였을 겁니다.
그러나 성 편견과 고정관념, 이중잣대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천재 소녀’라는 별명은, 뤄푸리가 받아야 할 마땅한 찬사의 초점을 바꾸고 맙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획기적인 AI 개발 성과를 거뒀다는 점보다, 여성이라는 점을 더 부각된 셈이기 때문이죠.
만약 뤄푸리가 남성이었다면 '천재 청년'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요? 아마도 그의 업적과 기술적 성과가 바로 헤드라인에 올랐을 겁니다.
‘천재 소녀’라는 용어는 단순한 능력이나 성취를 넘어, 여성성과 나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쓰인 사례입니다. 이는 여성의 이뤄낸 성과를 예외적이고 특이한 것으로 만들고, 남성과 동일한 기준에서 평가받지 못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죠.
사실 이러한 편견은 특이한 사례가 아닙니다. IT업계의 ‘남성 지배적 문화’는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에밀리 창은 책 ‘브로토피아(Brotopia)’에서 실리콘밸리에 만연한 성차별을 폭로합니다. 여성 엔지니어가 입사 첫날부터 당한 성적 모욕과 차별 사례가 가득합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의 2017년 보도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있는 10개 메이저 IT 기업의 기술 직종에서 여성 비율은 18.3%에 그쳤습니다. 타 업종 평균과 비교해 매우 낮은 수치였죠.
국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 ICT 전문인력의 성비를 살펴보면, 2017년 기준 여성은 21.2%, 남성은 78.8%로 남성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성인지통계·2021).
그렇다면 IT업계는 원래 남성의 무대였을까요? 남성이 잘할 수 밖에 없는 분야인 걸까요? 역사를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컴퓨터의 역사, IT의 역사, AI의 역사책에는 여성의 피와 땀, 눈물이 짙게 배어있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 ‘컴퓨터’란 용어는 ‘여성’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컴퓨터’는 계산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을 의미했습니다. 계산원 대다수는 여성이었죠.
여성 계산원들은 방대한 천체 관측 데이터를 계산하고 분석해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하버드 천문대의 계산원 헨리에타 스완 리비트(Henrietta Swan Leavitt, 1868-1921)는 우주 거리 측정 방법의 혁명을 가져왔죠.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여성들이 암호 해독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독일군이 활용한 암호(에니그마)를 해독해 낸 연합군 통신센터 블레츨리 파크의 직원 1만 명 중 3분의 2는 여성이었습니다.
NASA에서도 여성들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실제 주인공인 캐서린 존슨은 아폴로 11호의 궤도 계산을 담당했죠. 최초의 범용 컴퓨터 에니악(ENIAC)의 첫 프로그래머 6명도 모두 여성이었습니다. 수백, 수천개의 방정식을 일일이 손으로 계산하는 일을 했죠.
1967년 미국 잡지 코즈모폴리턴이 ‘컴퓨터 소녀들(The Computer Girls)’란 제목으로 낸 기사의 내용을 보시죠.
“프로그래밍은 저녁 식사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다…미리 생각하고, 무언가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계획해 두어야 한다. 인내심과 디테일에 신경 쓰는 능력이 뛰어난 여성에게 프로그래밍은 본성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컴퓨터 산업이 여성 친화적이었던 증거는 또 있습니다. IBM의 당시 광고를 보면 여성을 주요 타겟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컴퓨터 운영 매뉴얼에도 여성을 모델로 한 사례가 많았죠.
1970년대 이후부터 변화의 조짐이 나타납니다. 컴퓨터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부상하면서 남성들이 대거 유입됐고, 이 분야는 점차 전문적인 것으로 취급됐습니다. 프로그래밍이 단순한 행정 업무가 아니라 컴퓨터 공학의 일부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죠.
대학들은 컴퓨터 관련 학위 과정을 개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공계 교육은 (이때도)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됐기 때문에, 신설된 컴퓨터 공학 역시 그러한 모양새였죠.
광고의 흐름도 바뀌었습니다. 1970-80년대 PC 혁명기에 개인용 컴퓨터(PC)는 ‘소년들의 장난감’으로 묘사됐죠. 이들 세대는 후에 실리콘밸리의 주역이 됩니다.
'차고에서 시작하는 스타트업' 신화는 주로 젊은 남성 엔지니어들을 중심으로 형성됐죠. 장시간 근무, 극도의 경쟁, 위험 감수 등을 강조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습니다. 여성의 가사노동, 돌봄노동이 당연시되는 분위기에서 여성이 버티기는 구조적으로 힘들었죠.
점진적으로 이뤄진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남성 중심적 IT 문화가 공고히 굳어졌습니다. IT 업계에 만연한 오해와 편견은, 태생적·기술적 필연성이 아닐 사회문화적 요인의 결과인 것입니다.
뉴욕타임스(NYT)는 2019년 2월 ‘코딩업계 여성들의 숨겨진 역사(The Secret History of Women in Coding)’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현재 컴퓨터 프로그래밍 영역은 남성 지배적 구조에 성차별이 만연해 있지만, 한때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성평등을 이루고 있었음을 설명합니다.
실제 역사는 IT업계가 남성만의 독무대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수작업 계산과 초기 프로그래밍 작업은 주로 여성들이 담당했으며, 이들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기술 발전 기여했죠. 그러나 사회적, 문화적 환경 변화와 함께 프로그래밍이 공학의 한 분야로 자리 잡으면서 남성 중심의 문화가 형성됐죠. AI시대를 맞이한 오늘날에도 이런 문화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컴퓨터 과학의 역사가 보여주듯, 성별에 따른 역할과 기대는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왔습니다.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배워야 할 점은 기술 자체가 성별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남성 중심의 문화는 본질적인 기술적 요구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문화적 선입견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AI 천재소녀 뤄푸리’는 바로 그러한 문화의 흔적일 겁니다.
AI는 새로운 산업 혁명을 이끌고 있습니다.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교육 단계부터 여성과 소수자에게 기술 교육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기업 내부에서도 다양한 배경의 인재를 적극 발굴·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합니다. AI가 인류의 미래를 만들어갈 핵심 기술이라면, 그 발전 과정에서 성별의 다양성 역시 더욱 중요할 겁니다.
매킨지(McKinsey)의 보고서에 따르면, 다양성·포용성 지수가 높은 조직은, 그렇지 않은 팀보다 성과가 더 좋았습니다. 더 많은 참여자를 확보하고, 더 나은 인재를 고용하고, 노동자의 이탈률을 낮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과거 여성들이 IT 발전에 기여했던 사례를 재조명하고, 이를 토대로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AI 시대의 혁신 속도를 더욱 높이는 방법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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