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최근 8년간 한국기업들이 미국에 설립한 법인 숫자가 중국에 세운 기업 수를 2배가량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1기 출범 첫해인 2017년까지 국내 기업이 미·중에 각각 설립한 법인 숫자는 엇비슷했는데, 그 이후부터 격차를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공급망 변화는 트럼프 집권을 계기로 서서히 진행된 셈이다.
아시아경제가 26일 한국수출입은행 통계와 우리 기업들의 해외 생산기지 이전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기업들이 미국에 세운 법인 수는 이 기간 연평균 604개로 중국(324개)보다 갑절 많았다. 2017년 미·중 지역에 설립된 한국 기업들의 신규법인 수는 500개 중반대로 비슷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지난해 9월 중국 톈진 법인을 말소하면서 2018~2020년 진행된 스마트폰·TV 공장 철수 작업에 마침표를 찍었고 LG전자도 이보다 앞선 2019년 중국 타이저우 공장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던 프리미엄 냉장고 생산기지를 국내 창원 공장으로 이전했다.
신원규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기업들은 소비 시장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고, 밸류체인이 다시 재배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비용·고효율’로 대표되는 기존 공급망이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과 미·중 패권 경쟁을 거치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집권 당시 탈(脫) 중국 흐름에 불을 붙인 데 이어 이제 동맹·우방 가릴 것 없이 ‘관세 폭탄’을 겨누고 있다.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공급망 재편 시간표를 앞당기고 있다.
반도체·가전제품·전력기기·자동차·배터리 등 국내 대표 수출 기업들은 ‘트럼프 1기’를 기점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구축됐던 해외 생산기지를 미대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진출한 중남미 지역의 생산라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후 설비확장 등 신규 투자를 진행했다. 해운업 특성상 불확실성을 줄이고 항만 인력 부족에 따른 적체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반면 중국에선 공장 폐쇄·축소가 줄을 이었다.
이 같은 생산기지 이동은 비용 대신 리스크 줄이기가 공급망의 최우선 고려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2020년 현대차는 중국에서 생산하던 범용부품인 ‘와이어링 하네스’ 공급이 중단되자 신차 생산을 중단한 바 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들은 공급망을 생산기지와 가까이 놓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여기에 트럼프 집권 2기가 시작 직후 관세 폭탄까지 떨어지자 이전을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투자 역시 중국에서 미국으로의 이동이 뚜렷하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대미 투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 집권한 2017년 153억3100만달러에서 2023년 280억450만달러까지 급증했다. 그해 우리나라 해외직접투자(ODI)에서 미국이 차지한 비중은 43.7%에 달했다. 지난해 한시적인 감소세는 미 대선을 앞두고 불확실성이 증대된 영향으로 풀이된다.
중국에 대한 투자는 감소세가 뚜렷하다. 2017년 32억2600만달러에서 지난해 11억4400만달러로 급락했다. 멕시코·캐나다의 경우 같은 기간 4억9700만달러·4억4900만달러에서 12억9700만달러·30억6100만달러로 늘어 대중 투자를 크게 앞질렀다. 2021~2022년 일시적으로 투자가 회복된 건 중국 정부의 ‘외국인 투자 제한 철폐’ 등 정책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트럼프 1기 시절 미국·멕시코·캐나다 자유무역협정(USAMC)이 체결되면서 니어쇼어링(Nearshoring) 정책이 탄력을 받았다. ‘미국 가까이 오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 기업들은 ‘미국 안으로 들어오라’는 요구에 직면했다. 한층 더 강력해진 온쇼어링(Onshoring)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급망 재편을 가속하는 수단으로 ‘관세’를 꺼내 들었다. 우리 기업들은 위험요인을 피해 미국 내 생산기지를 구축하거나 현지 조립라인을 확대하고 있다. 인접한 북미·중남미 지역에 대한 투자도 확대하면서 ‘시장’ 주변으로 ‘생산기지’가 모여들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400억달러(약 55조원)를 들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SK하이닉스가 인디애나주에 38억7000만달러(약 5조원)를 투자한 것도 같은 이유다.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 이후 국내 배터리 3사가 미국에서 운영·건설 중인 생산기지만 15곳에 달한다. 반면 니어쇼어링 정책을 따라 진출했던 멕시코·캐나다가 트럼프의 관세 사정권에 들어간 만큼 이들 지역에 진출한 기업들 타격은 불가피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관세 전쟁’의 목표는 미국의 제조업 부흥을 되찾고 첨단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온쇼어링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공급망 변화는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엔 치명적이다. 통상 전문가 및 연구기관들은 우리 기업들이 입게 될 수출 타격을 최대 20조원 규모로 보고 있다. 한국무역협회는 미국이 중국·멕시코·캐나다에 대한 조치에 이어 모든 국가에 보편 관세까지 부과할 경우 우리 대미 수출은 100억3000만달러, 대멕시코 수출은 15억700만달러 줄어 총수출은 132억달러(약 19조원) 감소할 것으로 분석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수출총액 6838억달러(약 984조원)의 2% 수준이다.
미국이 촉발한 공급망 변화는 다른 지역으로도 확대될 전망이다. 제3 지역을 비롯한 신흥 시장으로 공급망 다변화를 모색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LG전자·현대차 등은 최근 인도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중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로 떠오른 인도는 ‘기회의 땅’으로 평가된다. 시장과 가까운 곳에 생산기지를 두는 건 미국 이외 지역에서도 공식이 되고 있다. 이미 인도 정부도 세율 인하 등 정책 개혁을 통해 제조업 투자를 촉진하고 있다.
동유럽·동남아 등도 공급망 변화 지역으로 꼽힌다. 폴란드·헝가리 등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유럽 허브 국가들은 저렴한 인건비와 유럽의 친환경 정책이 맞물리며 주목받고 있다. 인도네시아·베트남·필리핀 등은 아세안(ASEAN) ‘빅 3’로 꼽힌다. 국가적 차원의 산업 육성 정책으로 내수시장·생산기지로서의 경쟁력이 급부상하고 있다.
한아름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지금도 미국 현지 투자를 검토하는 기업들이 많겠지만, 당장의 관세 부과 등 정책적 요인만으로 투자를 결단할 순 없다"며 "정책의 변동 가능성, 현실적인 비용, 2년 뒤 미국 중간선거에 따른 의회 구성 변화 등 다양한 요인들을 구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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