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야마자키(山崎)'
산을 뜻하는 '야마(山)'와 산부리를 뜻하는 '자키(崎)'가 더해져 '산기슭'이라는 뜻을 지닌 야마자키는 위스키 애호가들이 열광하는 이름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종합음료기업 '산토리(Suntory)'는 오사카부에 야마자키 증류소를, 야마나시현에 하쿠슈(白州) 증류소를 운영 중이다. 2023년 한해 동안 산토리의 위스키 증류소를 방문한 인원은 총 30만명에 달한다.
한국인 방문객도 전년 대비 30%가량 늘어난 2만4000여명이 찾았다. 야마자키 증류소에서 위스키 제조 과정을 둘러보고 테이스팅까지 진행하는 2시간 코스의 프레스티지 투어는 1인당 가격이 1만엔(약 9만7000원)이다. 고가의 비용에도 수차례 도전해야 투어 티켓을 거머쥘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인기 비결은 명료했다. '품질'
일본 도쿄의 산토리 본사에서 만난 나라 타쿠미(奈良 匠) 산토리 위스키 마케팅 부장은 "산토리는 백 년 이상 위스키를 만들어온 회사로서 전통과 기술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면서 "산토리는 일본인 특유의 입맛에 맞추면서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맛과의 조화도 추구해 균형 있는 위스키를 만들어냈고, 결과적으로 국내외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산토리 위스키의 빼어난 품질이 다양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해당 위스키에 대한 궁금증이 증류소 방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각각 택한 주세법은 양국의 주류 산업 지형도를 바꿔 놓았다. 일본은 1989년 주세법 개정을 통해 술의 출고가격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종가세에서 용량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종량세로 주세 체계를 전환했다. 주종 간 차등 세율을 폐지해 세금 체계를 단순화한 것으로, 세 부담의 공평성을 추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위스키와 사케, 맥주의 세율은 낮아지고 소주와 와인의 세율은 인상됐다.
모든 주종이 종량세로 전환되면서 일본 주류기업들은 고급 주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양질의 재료를 사용해 생산단가가 높아지면 높은 세율이 부과돼 제품 가격이 상승했고, 이는 판매의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생산단가와 관계없이 동일한 세율이 적용되는 종량세로 전환하면서 기업은 세금으로 인한 판매가 상승 부담에서 자유로워졌고, 위스키와 사케 등 세 부담이 컸던 고급 주종을 개발할 동기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주류 제조사가 양질의 제품 개발 경쟁으로 품질 향상이 이뤄지면서 소비자들도 저렴하게 고급 술을 찾게되면서 일본 주류산업은 전성기를 맞았다.
산토리는 위스키는 물론 맥주, 와인, 커피, 음료수 등을 모두 취급하는 일본의 대표 주류 제조업체다. 1899년 토리이 신지로가 와인 사업을 목적으로 창업했고, 1923년 야마자키 증류소를 세우며 위스키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깔끔한 위스키를 목표로 1937년 '가쿠빈'을 만들어냈고, 이 제품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며 '재패니즈 위스키'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100년이 지난 현재는 일본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와 함께 세계 5대 위스키 생산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산토리는 지난해 3조797억엔, 한화로 약 29조365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사업부별로는 음료 사업이 1조6887억엔으로 전체의 55%, 주류 사업이 1조557억엔으로 34%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최대 주류회사인 하이트진로의 지난해 매출이 2조5992억원, 최대 종합음료회사인 롯데칠성음료가 4조245억원인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규모다. 영업이익 역시 3289억엔(약 3조1500억원)으로 10.7%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며 국내 두 회사보다 높은 수익성을 보여줬다.
산토리에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쿠빈의 성공에 힘입어 일본 위스키 시장은 고도 경제성장기(1954~1973년)를 거치며 크게 성장했고, 1983년 일본의 위스키류 전체 제조량은 41만2000㎘에 달했다. 그러나 1983년부터 2007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젊은 층의 음주량이 점진적으로 감소했고, 저가 제품 지향 추세 등이 더해지며 위스키 소비도 내리막을 걸었다. 업계 차원의 대책 마련이 절실했다.
당시 산토리가 꺼낸 카드가 '하이볼'이었다. 나라 부장은 2008년을 위스키 산업 부활의 전환점이 된 해라고 짚었다. 그는 "고급 이미지가 강했던 위스키를 서민적인 이미지로 대중화하기 위해 편안하게 식사와 잘 어울릴 수 있는 하이볼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며 "산토리 제품이 아니더라도 섞어 마시는 음용법 확대가 업황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하이볼의 히트에 힘입어 일본 위스키류 제조량은 2007년 6만3000㎘에서 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9년에는 15만7000㎘까지 증가했다.
하이볼 마케팅은 일본을 넘어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라 부장은 "한국은 일본과 비슷한 식문화를 가지고 있어 더욱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며 "하이볼의 인기와 함께 위스키 카테고리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방일 관광객 수요와 함께 위스키 원액이 부족해지는 상황도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무작정 생산량을 늘리지 않았다. 이는 수요 대비 공급 부족으로 인한 가격 상승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산토리는 일본 내수에만 의존하는 기업이 아니다. 지난해 기준 내수 매출이 전체의 48%를 차지했고, 아시아·태평양 20%(6017억엔), 미주 17%(5316억엔), 유럽이 15%(4668억엔) 비중을 차지해 해외 매출 비중이 더 높다.
일본 위스키의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한 업계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양주주조조합은 그동안 모호했던 일본 위스키의 정의를 '맥아, 곡물을 사용하고 일본 국내에서 확보한 물을 사용할 것, 일본 국내 증류소에서 제조하고 700ℓ 이하의 나무통에 담아 국내에서 3년 이상 숙성할 것' 등으로 정하고, 지난해 4월부터 '재패니즈 위스키'라고 표시할 수 있는 인증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일본 위스키 업계는 이를 통해 제품의 품질과 안전성이 높아져 관련 산업이 한층 더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본 주류산업에 산토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최근 위스키 외에 전통주인 사케(니혼슈) 수출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일본 주조조합중앙회(JSS)에 따르면 지난해 사케 총수출액은 435억엔(약 4160억원)으로 전년(411억엔) 대비 5.8% 증가했다. 2015년 사케 수출액은 140억엔 수준이었지만 10년 만에 3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프리미엄 사케 시장이 크게 성장했는데, 2020년 이후 수출액은 1.8배, 평균 단가는 1.3배 증가했다. 물량 면에서도 80개국에 사상 최대인 345만 상자(환산량 9L)가 팔려나갔다.
최근 사케 시장의 성장은 정부와 업계 차원의 고급화 전략이 주효하고 있다는 평가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일본 사케 업계는 품질 향상과 이미지 변화에 주력하고 있다"며 "독자적인 양조미를 개발하고, 효모 연구 등 양조장마다 고유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지난해 12월에는 사케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는데, 사케가 쌀 도정에서부터 발효, 가공 등 복잡한 주조과정을 거쳐야 하고 생산단계마다 정교한 주조기술이 적용되는 고급 기술의 산물임을 꾸준히 강조한 결과라는 평가다.
주세법 개정은 소주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소주, 즉 쇼츄는 '갑류쇼츄(甲類?酎)'와 '을류쇼츄(乙類?酎)'로 분류되는데, 갑류가 희석식 소주, 을류는 증류식 소주와 같은 종류의 술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녹색병의 희석식 소주는 일본에서 탄생한 조주 방식으로 1895년 동아시아 최초로 주정 생산에 성공한 이래 1899년 발명됐다. 이것이 바로 갑류쇼츄로 한국에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왔다.
과거에는 일본에서도 희석식 소주가 상당량 소비됐다. 하지만 주세법 개정으로 고품질의 을류쇼츄의 세 부담이 크게 내려가면서 굳이 갑류쇼츄를 소비할 유인이 사라지게 됐고, 수십 년이 지난 현재 일본의 소주 시장은 고품질의 증류식 소주 중심으로 재편되게 된다.
일본 가고시마에서 고구마 소주와 위스키를 모두 생산하고 있는 유명 생산자 요이치로 니시 니시주조 대표는 "일본은 1989년 종량세로 전환하면서 고가의 스카치위스키 가격이 낮아지게 됐고, 관련 위스키들이 인기를 얻는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로 인해 증류주 시장의 가능성을 본 생산자들이 많이 늘어나게 됐다는 것"이라며 "이는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일본 내 위스키와 증류식 소주 등 증류주 생산자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성장하게 되는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반면 종가세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주류 산업은 무역적자가 매년 이어지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주류 수입액은 13억4413만달러(약 1조9300억원)를 기록했다. 국내 주류 수입액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홈술과 혼술 열풍으로 크게 늘며 2022년 16억504만달러(약 2조3000억원)까지 증가했다. 이후 과열됐던 위스키·와인 수요가 안정을 찾으며 2년 연속 감소했지만 여전히 2조원에 육박하는 주류가 국내로 수입되고 있다.
수출 규모는 10년 이상 3억달러 선에서 머물며 제자리 걸음이다. 지난해 국내 모든 주종의 총수출액은 3억4908만달러(약 5000억원)로 전년(3억6414만달러) 대비 오히려 4.1% 감소했다. 주종별로는 소주가 고군분투하고 있다. 소주 수출액은 2021년 8242만달러에서 지난해 1억409만달러(약 1500억원)로 늘어나는 등 최근 3년 새 26.3% 증가하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절대적인 규모 면에서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최대 제조사인 하이트진로 소주 매출의 해외 비중은 작년 3분기 기준 4.0%에 불과하다.
수입 대비 수출 규모가 못 미치면서 매년 큰 폭의 무역 적자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주류 무역 적자는 9억9505만달러(약 1조3000억원)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10.2% 감소한 것으로 2년 연속 적자폭이 축소했다. 하지만 수출 증가가 아닌 수입 감소로 인한 어부지리 적자 개선이란 점에서 적자 폭은 언제든 다시 요동칠 수 있다.
주류 무역수지 적자는 세계 각국의 대표 술이 국내 시장으로 쏟아지는 상황에서 국내 주류업계가 국내시장을 사수하고 해외시장을 공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지 못해 발생한 결과다. 현재 한국에 대한 세계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진 가운데 K-푸드가 글로벌 시장에서 약진하고 있지만, 한국 술만 예외인 상황이다. 희석식 소주가 국제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장기적인 수출을 위한 간판 주류로서 확고한 위치를 확립하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도쿄(일본)=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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