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1945년부터 현재까지 80년째 생산 중인 해태제과 연양갱. 국내 생산 제과 가운데 최장수 제품이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지만, 사실 연양갱은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에 설립된 일본 나가오카 제과의 군납 식품 공장에서 출발했다.
양갱은 원래 일본의 전통 과자다. 으깬 단팥과 설탕, 물엿, 한천을 섞은 뒤 졸여 덩어리 형태로 만든 것을 양갱(ようかん·요깡)이라 한다. 본격적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한반도에 일본 자본이 유입됐는데, 당시 식품 가공업체였던 ‘나가오카 제과’도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과자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에서 국내 최초의 양갱과 캐러멜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해방 이후 나가오카 제과는 남영동 공장과 설비를 남겨둔 채 일본으로 떠났다. 1945년 나가오카의 경리 직원이었던 박병규 등 4인이 해당 공장을 인수하면서 해태제과를 세웠고, 이로써 국내 생산 과자 제품 1호 '해태 연양갱'이 탄생했다.
나가오카 제과는 왜 한국에 양갱 공장을 세웠을까. 일본 전통 과자인 양갱은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식품이었을 텐데 말이다. 해당 양갱 공장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 총독부가 한반도를 병참 기지로 삼으려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총독부는 쌀, 콩, 보리 등 곡물 생산에 집중했는데, 해외로 진출한 일본군에 전투 식량으로 지원할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인천에 국내 최초 선물 거래소인 인천미두취인소가 열리기도 했다.
양갱도 전투 식량 중 하나였으며, 병사의 사기와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한 핵심 물자였다. 군인들은 열량이 높은 과자를 배식 받아 체력을 보충했다. 미군, 영국군 등은 초콜릿, 캔디, 커피 가루로 병사들을 달랬다. 일본군에게는 양갱이 그런 수단이었다. 나가오카 제과 남영동 공장은 1927년 조선 주둔 일본군 군납 공장으로 지정됐고, 이곳에 고용된 조선인은 일본 병사들을 위해 양갱과 캐러멜을 생산했다.
양갱 공장이 한국에 들어선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양갱의 필수 원료인 한천 때문이다. 한천은 해초류의 일종인 우뭇가사리를 끓인 뒤 식혀 만든 묵 같은 식품인데, 한국에선 우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천도 1913년 일본인 사업가가 국내에서 제조하기 시작했고, 특히 해초류가 풍성한 제주 해안에서 한천 생산이 활발히 이뤄졌다. 당시 일본은 적극적인 대외 팽창 정책과 연이은 전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한천 수요가 높았고, 자연스럽게 한반도는 일제 한천 및 양갱 생산의 핵심 기지로 자리 잡게 됐다. 오늘날 국내 우무 중 약 90%가 제주에서 제조되며(통계청), 전체 생산량 300여톤(t) 중 대부분이 일본으로 수출된다.
비록 한국 양갱의 시작은 군납품이었지만, 이제 연양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대표 과자로 올라섰다.
연양갱 생산의 명맥이 끊길 뻔한 위기도 여러 차례 있었다.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당시 해태제과는 본사 공장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지만, 이후 부산에서 솥과 보일러를 옮겨 다니며 양갱 생산을 재개했다고 한다.
국내 과자가 다양해지면서 한때는 ‘추억의 식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으나, 이후 등산용 에너지 식품으로 조명 받으며 꾸준히 스테디셀러에 자리매김했다. 지난해 2월엔 가수 비비의 싱글 음반 ‘밤양갱’의 인기로 연양갱 판매가 다시 급증하기도 했다. 시장 조사 기관 AC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연양갱은 1945년부터 2023년까지 누적 매출 7800억원, 판매량 35억개를 돌파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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