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재현 기자 =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교육개혁의 전도사로 변신한 모습이다. 명문대 학생을 지역별 인구 비례로 선발해 사교육을 타파하자고 연일 목청을 높인다. 사교육이 집값 상승과 가계부채 증가, 경기침체, 저출산을 야기하는 한국병의 근원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생경한 느낌을 준다. 이슈 메이커가 한은 총재라 그렇다.
▶ '전국 수석 → 서울대 물리학과' 코스는 흘러간 스토리다.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 떨어지면 '서카포'(서울대·카이스트·포항공대) 간다는 세상이다. 의대 열풍이 거세지면서 몇 해 전부터는 강남 학원가에 초등의대반이 생기더니 최근엔 나이가 더 내려갔다고 한다. "어머님. 이젠 유치원 전부터 의대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여유가 있고 자식이 똑똑해 보이기까지 하면 어떤 부모라도 컨설턴트의 속삭임에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 2024년 n수생 포함, 의대 합격자 배출 고교(전국 자사고 제외) 순위를 보면 강남의 파워를 실감할 수 있다. 강남구 대치동 소재 휘문고를 선두로 세화, 중동, 숙명, 단대부속고 강남권 5개 고교가 50명 이상으로 상위권을 형성했다. 휘문고는 2022년에는 의대에만 151명을 보냈다. 의대에 단 1명만 보내도 학교 정문 앞에 현수막을 다는 비강남권 고교에는 꿈의 숫자다.
▶ 한은 총재의 소원대로 지역 인구별 비례제를 도입하면 의대 꿈을 꾸는 부모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인구 쿼터에 따라 강남 고교 1곳에 배당된 의대 정원이 3명이 됐다고 치자. 맹모라면 당장 십수억의 전세금 빼서 내신 따기 쉬운 '낮은 학교'를 찾아 흩어질 것이다. 강남을 정점으로 한 학군 수요 소멸은 전국 대도시의 집값 안정은 물론 가계부채 감소와 소비촉진, 경기 활성화를 가져오고 저출산 완화로도 이어질 수 있다.
▶ 지역비례제를 꺼내면 "자본주의에 맞느냐"는 반문이 나오지만, 알고 보면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이 채택하고 있는 제도다. 한국의 '스카이'(서울·연고대)에 해당하는 하버드·예일·컬럼비아·프린스턴 등 아이비리그 대학의 경우 남녀, 인종, 주별 인구 수, 가구 소득에 따라 학생을 선발하고 있다. 평균적으로 남녀는 50대50, 인종은 백인 45% 대 아시안·히스패닉·흑인 55% 비율로 뽑는다. 정원의 10% 안팎인 외국인 학생도 국적별 쿼터가 적용된다. 성적보다 다양성이 입시의 절대 원칙이다. 극단적 비례제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기에 명문대에 붙으면 기쁘고 떨어지면 '운이 없었다'는 위로를 받는다.
▶ 이 총재의 제안에 대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다. "물가 관리나 잘 하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공정과 평등이 앞서는 나라에서 이런 쓴소리가 나오는 것은 자기 자식만큼은 명문대 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탓도 크다. 중학교 때까지 명문대에 자식 보낼 꿈에 부풀어 있다가 고등학교 가면 '인서울' 대학도 못 가는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데, 문제는 자각의 시간이 너무 늦다는 것이다.
▶ 이 총재의 주장이 여론의 호응을 끌어내려면 학부모들이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시기를 최대한 앞당기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역설적으로 초등의대반이 뜻밖의 해법이 될지 모르겠다. 여유가 없는 학부모들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 '이게 나라냐'는 탄식이 퍼질 것 같아서다.
j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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