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삼성전자에서 일하는 지인이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기술삼성’을 자부했던 삼성전자의 기술력은 이미 경쟁업체에 뒤처졌고 인력마저 경쟁업체로 대거 이탈하고 있다는 토로였다. 직원들의 소통 커뮤니티에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직원들의 후기가 여럿 올라왔다고 했다. 엔비디아에는 이미 수백 명의 삼성전자 출신들이 근무하고 있고, 마이크론으로 이직할지를 두고 고민하는 직원도 많다는 것이다. 능력 있는 직원은 글로벌 경쟁사로 빠져나가고, 회사에는 ‘삼무원’만 남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가득했다. 삼무원은 삼성전자와 공무원을 합친 말로, 삼성의 강점이었던 혁신성은 사라지고 관료주의만 남은 현실을 말해 준다. 삼성전자가 쇠락하는 모습은 지금의 한국 경제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국 경제가 발전한 원동력은 삼성, 현대, SK, LG 등 대기업 창업주들의 혁신성에서 비롯됐다. 이들 기업 오너들이 창업 2세, 3세로 이어지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들이 많다. 테슬라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 엔비디아를 설립한 젠슨 황 등은 모두 창업주로, 한국 기업인들이 이들과 경쟁할 만큼 치열한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한국 기업에서 기업가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은 기업인만의 문제인가. 한국 정치의 잘못은 더욱 크다. 기업에 대한 정치인의 비뚤어진 인식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권력을 잡으면 기업인의 팔목 꺾기부터 한다. 권력에 줄을 세우다 비협조적인 기업에는 갖은 압박과 괴롭힘을 가한다. 매년 국정감사에서 별 이유 없이 기업인들을 불러세우는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 몇 년간 국회에서 논의된 법안 가운데 정작 기업의 환영을 받은 법안은 찾기 힘들다. 미국, 중국, 일본 등 경쟁국이 인공지능(AI), 바이오, 양자컴퓨터, 반도체 등 첨단산업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지만 한국 국회는 기업을 외면하고 있다. 국회에 계류됐지만 아직 심의되지 않은 기업 관련 법안은 상법, 반도체특별법, 전력망확충법 등 수두룩하다.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다. 기업 경쟁력 저하, 정부·가계의 부채 부담, 부동산·주식 시장 침체 등 한국이 직면한 문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저출생고령화가 가져올 구조적 문제들을 해소하기도 벅찬데,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뒀다. 여기에 12·3 계엄 사태로 탄핵 정국에 돌입하면서 대내외 불확실성은 최고 수준으로 커졌다.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는 기업뿐이다. 기업이 성장해야 일자리가 늘어나고 재정도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다.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면 가계 소득 증가로 이어져 소비를 늘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기업이 잘 되면 해외 인재가 한국으로 몰리고, 자연스레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해외 각국이 첨단 기업·산업에 지원을 쏟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오는 26일 여·야·정 협의체의 첫 회의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 여야는 정치 현안을 둘러싸고 공방전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정쟁을 벌이는 것과는 별개로 기업 지원과 관련된 법안만은 하루속히 처리해야 한다. 경제를 챙기지 않는 정치세력은 아무리 정의로운 척하더라도 결국 국민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조영주 세종중부취재본부장 yj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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