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최근 만난 한 금융권 인사가 우리나라 금융부문의 혁신이 더딘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기자가 금융사 특유의 폐쇄성과 금융당국의 규제 등을 꼽자 그는 다른 얘기를 들려줬다. 금융사가 혁신서비스를 해보겠다고 금융당국에 제안해도 이를 검토해줄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심한 경우 3년이 넘도록 심사를 대기하는 경우도 있다"며 "중국의 생성형 인공지능(AI) 딥시크 같은 걸 개발해도 몇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라고 푸념했다.
기업이 신기술을 활용한 금융서비스를 시작하려 할 때 문을 두드리는 게 금융위원회의 금융규제 샌드박스(혁신금융서비스)다. 일정 조건을 갖추면 시중에 서비스를 우선 출시할 수 있도록 규제 일부나 전부를 면제하는 제도다. 기업이 분기별로 혁신금융서비스를 신청하면 혁신금융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출시 여부가 가려진다.
문제는 혁신금융서비스 신청이 급증하는데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현재 혁신금융심사위는 금융위원장을 수장으로 정부·학계·법조계 등 각 분야 전문가 24명으로 구성돼 있다. 2019년 출범 당시 숫자와 동일하다. 혁신금융서비스 신청건수는 2019년 84건에서 지난해 436건으로 급증했다. 2019년엔 심사위원 한명당 3.5건을 처리했지만 지난해엔 18.2건을 처리한 셈이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신청건수대비 혁신서비스 지정비율은 90%가 넘었다. 하지만 지난해엔 47.5%에 그쳤다.
지난해 신청건수가 급증한 건 신청방식이 개편된 영향이 일부 있다. 기존엔 기업이 금융위에 수요조사서를 제출하고 컨설팅을 받은 뒤 수시로 신청했었다. 지난해 2분기부터는 정기신청 기간에 자유롭게 신청하도록 했다. 이후 신청건수가 치솟았지만 담당인력은 늘지 않았다. 신청 취합은 금융위 디지털금융총괄과 금융규제샌드박스팀에서 하는데 인력은 고작 2명이다. 이후 심사를 올리기 전 은행·보험·핀테크 등 각 분야 담당 과에서 검토를 거치는데 업무부담이 적지않다. 금융위 관계자는 "기존에 없던 신사업이 많고 법률적·기술적 내용도 어려워 일일이 다 검토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업무 감당이 안되니 부작용도 나타난다. 금융혁신지원 특별법에서는 기업이 혁신금융서비스를 신청하면 최대 120일 내 심사를 완료하도록 돼있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120일을 넘기면 법 위반이니 당국이 데드라인 직전에 신청을 철회하라는 요구도 한다"면서 "서비스 출시 대기가 수년째 미뤄지는 이유"라고 귀띔했다.
많은 기업이 혁신금융서비스를 신청하게 하는 건 좋은 방향이다. 하지만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으면 민간위탁을 통해서라도 해소할 필요가 있다. 딥시크와 같은 서비스가 금융위 캐비넷 어딘가에 묻혀 서류로만 존재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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