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단순히 밸류업 정책을 한다고 기업가치가 올라가고 주주들이 보호를 받는 게 아니다. 회사가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의 이익을 빼돌리는데 주주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게 지금의 판례다. 기업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기본적인 인식을 바꿔야 한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
소액주주와 전문가들은 기업 내 횡령·배임 범죄가 줄어들지 않고 처벌 강화도 쉽지 않은 현 상황에서 주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국내 자본시장의 정보 비대칭성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지금의 법 제도 안에서 소액주주들은 상장사 임원의 금융 범죄 전과 기록을 모른 채 투자를 결정해야 하며 구체적인 상장폐지 사유가 발생하더라도 정리매매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내용을 알 수 없다.
올해부터 자산 1000억원 이상의 상장사는 회사의 내부회계관리제도 운영실태를 점검한 내용을 보고서에 담아 사업보고서 및 감사보고서에 첨부해야 한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11월 횡령 등을 예방하기 위한 '자금 부정 통제' 공시를 올해부터 실시한다고 밝힌데 따른 것이다. 다만 의무 공시 시점은 2025 사업연도 사업보고서가 나올 때부터로 내년에 자금 부정 통제 공시를 본격적으로 보게 될 전망이다. 자금 부정 통제 공시 의무화는 기업의 '깜깜이' 경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도입한 것으로 풀이된다. 금감원은 "회사의 자금 부정 통제 활동을 구체적으로 공시하면 경영진과 통제 및 점검 수행자의 책임 의식이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금까지 기업 내 횡령 사고를 막기 위한 대책들은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코스피 및 코스닥 상장사의 내부회계관리제도에 대한 감사를 의무화하는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이 2018년 11월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횡령·배임 범죄는 줄어들지 못하고 있다. ▲2022년 오스템임플란트의 2215억원 횡령 사건, ▲2023년 BNK경남은행 3089억원 횡령 사건, ▲지난해 우리은행 100억원대 횡령 사건 등 대형 횡령 사고가 계속해서 터졌다. 이복현 금감원장이 지난해 6월 우리은행 횡령 사건에 대해 "횡령 등 금융사고로 금융권 임직원의 도덕 불감증, 허술한 내부통제 등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횡령 및 배임죄를 강력히 처벌하는 내용의 법안은 계속 발의되고 있지만 법안 실행까지는 갈 길이 멀다. 20대 국회에서는 박주민·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오제세·김철민·박광온·원혜영 전 민주당 의원이 횡령 또는 배임 범죄의 양형 기준을 높이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박 전 의원의 경우 횡령 또는 배임으로 인한 취득액이 10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당시 법무부는 재산범죄에 과도한 형벌을 해선 안 된다는 취지로 반대했다. 2017년 9월26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1소위에서 이금로 전 법무부차관은 "100억원 이상을 기준으로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을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면 살인죄보다도 더 무거운 처벌"이라며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해당 법들은 임기만료 폐기됐다.
21대 국회 이후로는 횡령 및 배임 범죄의 양형기준을 손 보는 법안이 등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서민 대상 범죄일 경우 가중처벌하거나 취업 제한, 신상 공개 등 간접적으로 처벌하려는 시도는 이어졌다. 21대 국회에서는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이 횡령 및 배임이 다수의 서민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재산범죄일 경우 가중처벌하는 내용의 법안을, 서영교 민주당 의원은 50억원 이상의 횡령 및 배임 범죄를 저지르면 신상을 공개하는 내용의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하지만 이 역시 실행되지 못했다. 22대 국회에서는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특경법상 횡령 등 범죄로 처벌 받은 사람의 취업 제한 범위를 넓히는 법안을 내놓았는데, 현재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소액주주들은 기업의 횡령 및 배임 범죄를 막을 더 많은 보호책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적어도 정보 비대칭 문제 해소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장사 임원의 금융 범죄 전과 기록을 공개하고 이들의 기업 취업에 제한을 두는 장치가 있으면 횡령 및 배임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투자해 손해를 보는 일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재영 대유소액주주연대 대표는 횡령·배임 혐의를 받고 있는 김우동 전 대유 대표가 2018년 주가 조작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지만 곧바로 경영에 복귀한 것을 두고 '웃기는 일'이라고 말했다. 최 대표는 "나라에서 더 해 먹으라고 범죄자를 풀어준 수준"이라며 "김 전 대표의 전과 기록을 모른 체 매출 등만 보고 투자한 사람은 큰 손해를 본 셈"이라고 강조했다.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8년 사업보고서에 임원의 경제·금융 전과를 기재하는 내용의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개인정보 문제 등에 부딪혀 임기 만료 폐기됐다.
주주들은 구체적인 상장폐지 사유가 정리매매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공개되지 않는 것에도 불만을 보였다. 한국거래소는 올해부터 상장폐지를 앞둔 기업이 제출한 개선계획의 주요 내용을 공시하기로 했지만 정보가 부족하다는 게 소액주주들의 지적이다. 박수본 셀리버리소액주주연대 부대표는 "왜 정리매매를 마쳐야 한국거래소 홈페이지에서 상장폐지 최종 심의 의사록을 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정리매매 이전에 상장폐지를 결정할 때 상장폐지 관련 사유를 구체적으로 공개한다면 투자자들도 빠르게 납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법 개정 요구도 거세다. 이사의 충실 의무를 일반주주까지 확대하는 등 주주 권한을 확대하는 장치가 있다면, 횡령 및 배임도 줄지 않겠냐는 논리다. 김현 이화그룹소액주주연대 대표는 "횡령 및 배임 등 금융 범죄를 저지르는 건 대주주 또는 이사진인데 피해는 소액주주가 떠안아야 한다"며 "재산권을 지키는 차원에서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 이익을 포함하는 상법 개정안을 일관되게 지지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소액주주를 위한 보호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횡령 등 범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임원의 경제·금융 전과 공개 등 기업을 감시할 수 있는 추가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은 "횡령 등을 막으려면 사전적 감시가 중요한데 이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기업이 많다"며 "소액주주들에게 기업의 잘못된 경영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임원의 전과가 기업 경영 능력과 관련 없을 수도 있다"면서도 "경제·금융 범죄 전과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최소한의 기준이기 때문에 공개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다만 상법 개정안을 두고는 의견이 엇갈렸다. 소액주주를 뒷전에 두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지만 기업의 자율성 침해와 투자 등의 경영 활동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상법 개정안이 자칫 법체계를 무너트려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소액주주의 목소리는 앞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정부는 기업가치 제고(밸류업)를 약속했지만 미국 주식시장과 비교했을 때 주가가 크게 오르지 않았다"며 "지지부진한 주가와 정부의 밸류업 정책을 계기로 소액주주들의 주인 의식이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지금까지 주주들은 지정학적 리스크 때문에 주가가 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들어 기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어떻게 기업의 이익을 환원받을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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