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서울 중구 을지로는 원래 금고로 유명한 곳이었다. 섬유, 가구, 인쇄 등 산업으로 큰돈을 쥔 상인들이 너도나도 금고를 찾으면서 금고 업체도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을지로에 오래 있었던 상인들은 이 지역에 있던 10여개 금고 업체가 국내의 모든 금고를 취급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제는 과거의 영광이다. 2000년대 이후 2~3곳만 남고 을지로에서 금고 업체는 사라졌다.
최근 을지로 금고 업체는 다시 바빠지고 있다. 지난 5일 을지로4가역 인근 금고 제작업체 범일금고 판매장 앞에는 박스를 뒤에 실은 트럭 3대가 또 다른 물건을 기다렸다. 박스 안에는 쿠팡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팔린 금고가 들었다. 한 트럭이 실을 수 있는 금고는 24개. 직원들은 4번째 트럭에 실을 금고를 포장하고 있었다. 며칠간 100개 가까운 금고를 팔아치운 셈이다. 범일금고 관계자는 "확실히 금고 판매량이 늘어난 것을 체감한다"며 "쿠팡 등 온라인 플랫폼으로 가정용 금고를 구매하는 게 최근 추세"라고 했다.
을지로에서 아버지와 함께 40년간 금고 판매업을 운영한 이영규씨(57·남)도 요즘 금고 찾는 사람이 확실히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오프라인 판매만 하는 이씨의 주고객층은 온라인 상거래를 어려워하는 노년층이다. 새 제품이 없으면 중고라도 사갈 정도로 노년층 사이에서도 금고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이씨는 "연세가 들어서 꼭 물건을 보고 사야겠다는 분이 우리 가게를 찾는다"며 "계엄 선포 등 국내외 정치 상황이 불안정해서 금고를 보러왔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금고 업계가 살아난 것은 금값 덕분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14일 KRX 금시장에서 금 현물 1g당 가격은 장중 16만8500원을 기록하면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1년 전 시세인 8만6030원 대비 두 배 가까이 오른 셈이다. 특히 국내에서 금은 인기 투자처다. 역대 최고치를 찍은 날, 국내·국제 금 시세 간 괴리율은 장중 최고 24%를 기록했다. 가상화폐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소위 '김치 프리미엄'이 금에도 낀 셈이다.
실제로 금과 금고는 함께 잘 팔리고 있다. KT알파 쇼핑은 지난달 11, 15일 24K 순금 주얼리 판매방송을 진행해서 각각 주문 금액 5억7000만원, 7억6000만원을 기록했다. 총 2시간 방송 시간 동안 약 4000세트를 팔았다. 지난달 15일 오전 순금 판매 방송에 이어 오후에는 선일금고 제품을 판매했는데 135%의 판매 달성률을 나타냈다. KT알파 쇼핑은 지난달 21일 금과 금고 판매 방송을 특별 편성하기도 했다.
금고를 찾는 현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금리 하락, 경제 불확실성 등이 겹칠 때 사람들은 금고를 찾는다. 은행 등 국가시스템을 신뢰하기보다는 금, 현금 등 실물을 직접 보관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경제가 휘청거릴 때도 사람들은 금고를 찾았다. 양경숙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은행·국세청·통계청 등에서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20년 금고 제조업의 매출 과세표준은 2566억2100만원으로 전년(1273억1200만원) 대비 101.56% 증가했다.
금고 업계는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이 이어져 당분간 금고 시장도 호황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금리 인하를 통한 기업의 생산 및 투자 촉진을 계획하는 데다 관세 전쟁으로 글로벌 무역 시장을 흔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연방 의회의사당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우리는 인플레이션을 물리치고 모기지 금리를 낮춰 미국 가정의 주머니에 더 많은 돈을 넣을 것"이라며 "(미국 국채금리가) 아름답게 하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셀 수 없이 많은 나라가 우리보다 훨씬 높은 관세를 부과한다. 매우 불공정하다"면서 우방국에 대한 관세 인상을 예고했다.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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