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미국 달러화를 완전히 대체할 통화가 없기 때문에 달러화가 글로벌 금융에서 여전히 1위 자리를 유지하겠지만, 그 지위는 예전만큼 독보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달러화는 2015년을 정점으로 점진적인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트럼프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이 추세가 가속화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미국의 재정적자와 금리 상승에 대한 우려가 크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에 신간 ‘우리의 달러, 당신의 문제(Our Dollar, Your Problem)’를 내고 여러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책 제목인 ‘우리의 달러, 당신의 문제’는 1971년 미국의 금 태환 중지 당시 미국 재무장관이었던 존 코널리가 한 말이다. ‘이제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는다면, 미국이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지 않느냐’는 각국 당국자들의 질문에 코널리는 “이건 우리의 달러지만, 당신들의 문제”라고 답했다. 로고프 교수는 이에 대해 미국의 오만함을 상징하는 발언이라고 했다.
로고프 교수는 신간 초반에서 ‘루블화가 세계 기축통화가 될 수 있었을까’라는 내용을 다뤘다. 지금은 이게 우스꽝스러운 질문이지만 1960·197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세계 경제는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돼 각각의 경제 블록을 형성하고 있었다. 루블화 블록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많은 경제학자가 소련이 미국과 경제적으로 대등해질 것이라고 봤다. 결과적으로 현실은 그렇게 되진 않았다.
책의 핵심 주장은 “달러화의 지배는 결코 보장된 것이 아니며, 충분히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로고프 교수는 미국의 급증하는 정부 부채나 연방준비제도(Fed)에 대한 정치적 간섭이 달러화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 상실을 초래해 달러화의 지위가 점진적이 아니라 급격히 붕괴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런 시나리오는 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한때 소련의 붕괴 역시 그렇게 들렸던 적이 있었다.
최근 무디스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 달러화 가치 하락, 미국 국채 금리 상승 등의 상황에서 로고프 교수의 발언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 상황을 초래한 3가지 원인을 분석해 봤다.
미국 국채 가격은 하락(금리 상승) 추세다. 무디스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 이후 첫 영업일인 지난 19일 장중 한때 3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심리적 저항선인 5%를 넘어 5.01%를 찍었다. 이는 지난해 말의 4.786%에서 크게 상승한 수치다. 시장금리의 벤치마크인 10년물 수익률 역시 장중 한때 4.52%까지 올랐다. 이는 올해 4월말의 4.2% 수준보다 높다. 6개 주요 통화 대비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DXY) 지수는 27일 99.68을 기록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일인 지난 1월 20일(109.35)과 비교해 9% 정도 하락했다. 수익률이 오르는데도 통화가치가 하락한다는 조합은 경고 신호다. 수익률이 올라가는데도 투자자들이 떠난다는 건, 미국이 투자하기에 리스크가 있는 나라로 여겨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동안 투자자들은 미국 자산의 안정성을 믿고 글로벌 금융의 중심축으로 삼아왔다. 27조달러 규모인 미 국채 시장의 깊이는 미국 국채를 안전자산으로 만들었고 달러화는 상품, 원자재, 파생상품 등 거의 모든 거래에서 지배적인 통화다. 이는 ‘미국 예외주의’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로 미국을 다른 나라와 달리 특별하게 신뢰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해 내놓은 정책들은 이런 오랜 신뢰에 타격을 줬다. 지난 4월초 발표된 관세는 어떻게 산정됐는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고, 중국과는 며칠 사이에 서로 관세율을 100% 이상으로 올렸다가 갑자기 30%와 10%로 급격히 낮추기도 했다. 최근 유럽연합(EU)에는 6월1일부터 50%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했다가 이틀 만에 7월9일까지 유예한다고 했다. 지나치게 혼란스러워 정책 수립의 진지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트럼프는 또 연구개발 예산을 줄여서 혁신의 원천인 대학 등 학술연구기관을 공격하고, 비자 발급을 어렵게 해서 우수한 외국 인재의 유입을 막고 있다.
트럼프의 무모한 관세 전쟁은 경제 전반에 불확실성을 야기했다. 미국 성장률은 지난해 2.8%를 기록했다가 올해 1분기 -0.3%(연율 기준)로 마이너스 반전했다. 경기침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관세의 급격한 인상은 공급망을 붕괴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자극해 소비자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Fed는 기준금리 인하를 중단했다. Fed는 지난해 하반기 기준금리를 5.25~5.50%에서 세 차례에 걸쳐 4.25~4.50%로 1%포인트 낮췄는데 올해 들어서는 트럼프발 불확실성 때문에 기준금리를 3번 연속 동결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유일하게 미국에 대해 최고 신용 등급(AAA)을 유지했던 무디스가 지난 16일 장마감 이후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Aaa’에서 ‘Aa1’으로 한 단계 낮췄다. 불어난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정부지출 확대와 감세 정책 등으로 국가부채가 줄어들 조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재정적자는 연간 약 2조달러(약 2801조원)로 국내총생산(GDP)의 6%를 넘었다. 일반적으로 재정적자는 GDP의 3% 이내로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무디스는 이 비율이 2035년엔 거의 9%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2018년 미국 총부채는 21조5000억달러 수준이었지만, 현재 36조달러를 넘어섰다. 부채의 규모와 그 증가 속도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Fed의 손발을 묶고, 고금리는 부채를 눈덩이처럼 키운다. 이자율 1%포인트 차이는 연간 약 3600억달러의 이자비용 차이를 낳는다. 미국 정부가 국채 이자로 지급하는 돈은 2010년 4140억달러에서 지난해 1조1300억달러(약 1580조원)로 불어났다. 미국은 예산 중 약 7분의 1을 이자 상환에 쓰이고 있는데 이는 국방 지출보다 많은 수준이다.
여기에 수천억 달러 규모의 세금 감면 조치를 담은 감세 법안이 지난 4월 예산위 표결을 통과하자 미국의 재정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이 법안은 지난 22일 미국 하원에서 찬성 215표, 반대 214표로 가결돼 상원으로 넘어갔다. 책임 있는 연방예산위원회에 따르면, 해당 법안 시행될 경우 10년간 최대 5조2000억 달러의 국가 부채가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을 매년 2%포인트씩 더 늘리는 효과가 있다.
트럼프는 Fed에 기준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13일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년동월대비 2.3%로 둔화됐다는 발표 이후, 트럼프는 자신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인플레이션은 없고 휘발유, 에너지, 식료품 등 거의 모든 가격은 하락했다. Fed는 유럽과 중국처럼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올해 4월초 관세 발표 이후에도 투자자들이 미국 자산을 대거 매도하고 시장이 출렁이자 Fed의 금리 인하를 압박하고, 파월 의장 해임론까지 거론했다. 트럼프의 'Fed 흔들기'는 미국 자산 매도세를 더욱 부추기는 역효과를 낳았다. Fed는 독립된 기관으로 정당한 사유 없이 의장을 해임할 수 없지만, 내년 5월 파월 의장의 임기가 만료되면 트럼프가 자기 입맛에 맞는 인사를 임명할 수 있다.
정재형 세종중부취재본부장·경제정책 스페셜리스트 jj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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