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칩톡]반도체 시장 들었다 놓는 이 남자…'슈퍼을' CEO의 말말말
    입력 2024.10.27 08:30
"인공지능(AI)의 강력한 발전과 성장세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 외 부문은 회복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회복이 더뎌요. 이러한 현상은 내년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업체이자 '슈퍼 을(乙)'로 불리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유일 제조업체 ASML의 크리스토프 푸케 최고경영자(CEO)가 내뱉은 말 한마디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뒤흔들었다. '업황 풍향계'로 평가받는 ASML의 수장이 내놓은 발언인 만큼 시장이 얼어붙는 일명 반도체 겨울론에 힘이 실렸다. ASML의 주가는 발언 당일인 지난 16일(현지시간) 하루 만에 16% 이상 폭락했다. 이튿날도 주가가 6% 이상 추가 하락하며 충격파가 이어졌다. 엔비디아, TSMC 등 반도체 관련 주식도 휘청했다. 그야말로 'ASML발 쇼크'가 벌어진 것이다.

푸케 CEO는 올해 4월 피터 베닝크 전 CEO의 퇴임과 함께 ASML 수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CEO로는 6개월 차 신출내기이지만, 30년 가까이 반도체 산업에 종사한 업계 전문가다. 1997년 세계 3대 반도체 장비 업체로 꼽히는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2008년 ASML에 합류, EUV 담당 부사장과 최고비즈니스책임자(CBO) 등을 역임했다. ASML 장비가 AI 반도체 생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타임스지는 올해의 AI 관련 100대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그를 꼽았다.
푸케 CEO가 내년 업황 부진을 예고한 것은 ASML의 실적 전망 때문이다. ASML은 그의 발언 하루 전 3분기 실적 자료를 내놓고 내년 매출 전망을 기존 300억~400억유로(약 44조7500억~59조7000억원)에서 300억~350억유로로 하향 조정했다. 올해 3분기 장비 수주액 규모는 당초 시장 전망치의 절반 수준인 26억유로에 불과했다. 업황 부진이 예상되면 장비 투자부터 줄이는 반도체 업계 특성을 고려할 때 자연스레 반도체 겨울론이 힘을 받은 것이다.

특히 네덜란드에 기반을 둔 ASML은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꼭 필요한 EUV를 제작하는 세계 유일한 회사다. 삼성전자,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1대에 3000억원 수준인 장비를 너나 할 것 없이 확보하겠다고 나서면서 ASML은 반도체업계 '슈퍼을(乙)'이 됐다.
이처럼 영향력이 큰 만큼 ASML은 미국, 중국 등 반도체 패권을 쥐려는 국가들로부터 압박을 받기도 한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계기로 반도체 산업에 지정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면서 ASML의 수장은 주요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적절한 대응책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푸케 CEO는 지난 6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수년간 회사는 영업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제한 요소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한 요소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떠올랐다"고 평가했다.
상황 변화에도 그는 신중한 태도 대신 언론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반도체 업황이나 주요국이 내놓는 반도체 정책과 관련한 자기 생각을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다. 푸케 CEO는 지난 22일 블룸버그통신이 영국 런던에서 진행한 한 행사에서 "지정학적 상황을 보면 미국이 (중국에 반도체 기술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동맹국에 더 많은 압박을 가할 것이 분명하다"고 전망했다. 미국은 최근 3년간 ASML이 중국에 장비를 수출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네덜란드 정부를 압박해왔다. 푸케 CEO는 "네덜란드에 적절한 방향은 무엇인지, 유럽에 옳은 방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라고 강조했다.

중국은 ASML의 최대 시장이다. ASML의 올해 3분기 전체 매출의 절반가량이 중국(27억9000만유로)에서 발생했다. 현재 중국의 반도체 기술력과 관련해 푸케 CEO는 "첨단 분야에서는 10~15년 정도 뒤처져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기술 개발을 막아서면서 중국이 첨단 기술 대신 레거시(구형) 공정에 투자를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이 도입한 각종 제한 조치가 효과를 발휘하면서 중국의 반도체 기술 개발이 둔화했다고 보고 있다. 그가 중국이 생산하는 반도체를 "AI와는 완전히 다른 반도체"라고 표현한 이유다.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은 ASML의 불확실성 요소로 작용한다.
다만 푸케 CEO는 미국과 유럽이 대대적으로 도입한 글로벌 반도체 업체를 향한 대규모 보조금이 패권 경쟁 승리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최근 닛케이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이 향후 수년간 주요 반도체 생산지로 유지될 것"이라며 "미국과 유럽이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반도체 제조 경제 모델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보조금, 세제 혜택을 지급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효과를 거둘 뿐이라면서 반도체 생산에 투입되는 비용이 많이 드는 점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푸케 CEO는 유럽에서 시가총액 3위 기업인 ASML의 위치를 감안해 유럽 산업계에 필요한 발언을 잇따라 내놓는다. 최근 그는 네덜란드 정부가 반이민 정책을 쏟아내자 유럽 국가가 핵심 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이민자 유입을 제한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가 100개 이상 국적을 가진 기업을 만들었다"며 "어디에서든 인재를 데려오는 건 성공을 위한 절대적 조건이고 이를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 미국 등 다른 국가와 경쟁하려면 자본, 인력, 에너지에 대한 접근성이 필요하고 공장 지을 장소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자국의 반이민 정책에 반대해 해외로 본사를 이전할 것이라는 관측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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