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용 저효율' 고집 52년째 묵묵히 장 담그기…"전통간장은 '시간'으로 맛 내"
장담그기 문화 사라지며 한국의 맛 실종 '위기'…기후변화 등도 존립 위협
"유네스코 등재 좋은 일이지만, 짐 무거워…교육 통해 전통 장맛 널리 알려야"
(담양=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콩, 물, 소금 그리고 시간'
우리가 흔히 '간장'으로 생각하고 먹는 양조간장 등에는 콩(메주)을 소금물에 발효시키는 데 필요한 원재료 외에 다양한 맛을 내는 첨가물이 들어가 있다.
1천200여 개 장독이 가득한 전남 담양군의 장고(醬庫, 장독을 보관하는 장소)에서 지난 9일 만난 대한민국 전통식품 기순도 명인(35호·진장)은 "한국 전통 간장은 일절 첨가물을 넣지 않는 대신 '시간'으로 맛을 내는 것이 양조간장과 다른 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만큼 시간을 들여 장을 만드는 행위인 '담그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기 명인이 빚어내는 진장(陳醬)은 5년 이상 오래 묵어서 진하게 된 간장이다.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영문 'Knowledge, beliefs and practices related to jang making in the Republic of Korea')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확실시되면서 우리의 장(醬) 문화가 주목받고 있다.
기 명인은 한국 전통 장의 정체성은 '장을 직접 담그는 행위'에서 온다고 강조했다. 유네스코 영문 표기대로 한국 전통 장에 대한 지식, 신념, 관행이 중요하다는 명인의 철학이다.
◇ "우리는 한국의 장을 먹고 있는가"
과거 우리나라에는 집마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담아 놓은 장독대가 없는 곳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요즘은 장독 하나 있는 집을 찾기 힘들다. 이는 곧 집마다 각자의 장을 담는 문화가 사라졌다는 의미다.
'집안이 망하려면 장맛부터 변한다'는 속담처럼, 집마다 장을 만드는 시절에는 장맛이 모두 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은 가을에 수확해 준비한 콩으로 동짓달 말에 메주를 쑤고, 메주에 발효균을 피워 천일염으로 간을 한 물을 넣어 발효시키는 과정으로 만든다.
메주가 소금물과 만나 우려낸 것은 간장이 되고, 건져 낸 메주는 된장이 된다.
발효가 미생물의 성장과 변화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장소·시간·방법에 따라 장맛이 미묘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장 담그는 행위가 거의 사라진 지금, 우리는 식품기업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양조간장이나 왜간장만을 간장으로 알고 먹는다.
기 명인은 "전문 요리사들마저 전통 간장을 단지 '짠 간장'이나 '국간장'으로만 알고 있다"며 "장 담그기만 중단한 게 아니라 우리는 전통 장의 맛도 잃어버렸고, 대량 생산한 양조간장이 '한국의 맛'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 "유네스코 등재 실익 대기업이 독식할 것"
기 명인은 '담그는 행위가 사라지면 전통의 맛도 사라진다'는 믿음에 370여년 전부터 대대로 내려온 종가의 방식대로, 지난 52년간 묵묵히 장을 담가왔다.
고된 과정의 연속인 전통 장 담그기를 어떻게든 계속 이어가려고 장류를 상품화했고 명인 지정까지 받았지만 "종부, 명인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쉽지 않다"고 기 명인은 말했다.
생산과정에 기계를 도입하고 직접 만드는 대신 원재료를 사서 쓰면 대량생산도 가능해 생산 제품의 가격을 낮출 수는 있지만, 그러면 장맛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어 '고비용·저효율'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최근 급격한 기후변화가 전통 장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기후가 변하면서 메주에 피어나는 균의 종류가 달라졌고, 무더위가 길어지고 기온도 올라 장독 안에서 이뤄지는 숙성 과정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기 명인은 외부 지원을 받아 미생물의 생장을 조사해 메주의 크기를 절반으로 줄여 유익균을 늘리려 했고, 장독대 옆에는 봉숭아를 심어 장독대에 그늘을 만들어 온도를 낮추는 시도도 했다.
대기업의 대량생산 간장 중심으로 규제하는 법과 제도도 문제다.
전통 장은 오랜 세월을 두고 숙성하는 발효식품인데, 생산제품에 와인처럼 생산 연도를 표기하고 싶어도 현행 식품법은 대기업 위주로 만들어진 탓에 소비기한을 표기해야 한다.
오래 두고 숙성시킬수록 맛이 깊어지는 장류의 장점을 상품화하는 순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전통 장의 사업화에 힘쓰고 있는 기순도 명인의 아들은 "유네스코 등재가 이뤄지면 다시 전통 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겠지만, 지금의 제도·정책과 지원 체계라면 그 실익은 장류 생산 대기업이 가져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 "한국의 맛 되찾는 교육이 중요…무거운 짐"
기 명인은 '한국의 맛'을 다시 찾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통 장을 소개하는 행사가 많이 늘어났지만, 요리사와 음식을 먹는 이들이 전통 장을 맛볼 기회를 늘려 한국의 맛을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텔 식당 등 일부 고급 한식당은 제외하고는 전통 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요리사들은 양조간장과 쓰임과 맛이 다른 한식 장을 사용할 줄도 모르고, 온갖 요리법도 양조간장을 중심으로만 만들어진다.
어렵게 일선 학교급식에 전통 장을 공급해도, 전통 맛을 모르니 사용할 줄도 몰라 고작 미역국에 국간장 정도로 사용되는 현실이다.
음식 맛을 지배하는 양조간장 맛에 길든 소비자들도 한국의 맛을 다시 알고 느끼지 못한다면 전통 장을 찾지 않게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기 명인의 가족은 그래서 최근 전통 장을 알리기 위해 '발효학교' 운영에 집중하고 있다.
전통 장을 담그는 것을 배우고 싶은 이들에게 아낌없이 전통의 방식을 전수하고, 한국의 장의 맛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전통 간장·된장·고추장의 맛을 선보인다.
전통 장맛을 알게 된다면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그러면 전통 장을 계속 보존하며 담글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사업상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명인은 교육에 나서고 있다.
기 명인은 묵묵히 전통장 문화를 지켜온 명인으로서 유네스코 등재라는 경사를 반겼지만, 한국의 장 문화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위기감에 마냥 기뻐하지는 못했다.
그는 "우리나라 장 문화가 사라지고 있어 너무 아쉽다"며 "제대로 된 전통 장을 선보이고 이를 맛본 이들이 전통 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도록 맛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는 좋은 일이지만, 장 담그기 문화가 사라져 한국 본연의 맛까지 사라지는 현실 속에서 마치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되는 것 같아 짐이 더 무거워졌다"고 말했다.
pch8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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