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현대차는 2023년 국내 상장사 영업이익 1위를 차지했다. 14년간 부동의 1위를 지켜온 삼성전자를 제친 것이다. 당시 현대차 영업이익이 15조원을 기록한 반면 삼성전자는 6조5000억원 수준으로 절반에 못 미쳤다. 현대차·기아를 합치면 26조원으로 삼성전자의 4배에 달했다. 물론 현대차가 거머쥔 '국내 상장사 이익 1위' 타이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반도체 업황이 반등하면서 이듬해인 2024년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32조원대로 회복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현대차·기아는 26조원대 영업이익을 유지하며 3년 연속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전형적인 사이클 산업인 반도체가 휘청일 때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또 다른 축은 자동차 산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최근 언론 기사 제목을 보면 삼성전자엔 위기, 현대차그룹엔 기회라는 키워드가 자주 등장한다. 영업이익 32조원대 회사에 위기를, 26조원대 회사엔 기회를 언급하다니. 아이러니하다. 한 기업에 대한 평가는 현재 나타나는 숫자도 중요하지만 성장 속도와 미래 먹거리에 대한 준비가 결정적이다. 미래 가치는 주가에 바로 드러난다. 최근 3년간 삼성전자 주가(2025년 2월 5일 종가 기준)는 28% 하락했지만 현대차와 기아는 각각 7%, 21% 상승했다.
국내 재계에서 삼성과 현대차에 대한 위상도 달라졌다. 이같은 위상 변화는 채용시장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에서 현대차로의 이직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직군을 중심으로 삼성전자에서 현대차로 이직 사례가 속속 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직 사유로는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순위 상승과 신사업에 대한 투자 강화, 안정적인 업무 환경 등이 꼽혔다. 채용 플랫폼 진학사 캐치가 구직자 및 직장인 346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2024년 이직하고 싶은 기업'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기업은 SK하이닉스였다. 직전 해 2위에 올랐던 삼성전자는 6위로 떨어졌으며, 현대차는 삼성보다 한 단계 높은 5위로 나타났다.
최근 몇 년사이 나타난 두 회사의 변화에 대해 다수의 재계 관계자들은 결국 '리더십의 차이'라고 입을 모았다. 산업통상자원부 출신 고위 관계자는 "현대차는 오너가 업무의 디테일을 챙기면서 리더십의 색깔과 방향성이 뚜렷하게 보이는 반면 삼성은 그렇지 않다"며 "(삼성) 오너의 사법 리스크로 인한 경영 전략상 실기도 아쉬운 부분"이라고 꼬집었다.
금융시장에서 보는 시각도 비슷하다. 가치투자펀드 운용역은 "시장에서 보는 펀더멘털은 사실 두 회사가 똑같다. 기존 메인 비즈니스에서 '피크아웃(정점을 찍고 하락의 기미가 보임)' 우려가 나오고 있고 중국의 공세가 거센데다 신사업에서도 확실한 글로벌 리더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다만 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경영진의 자세와 속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삼성전자는 핵심 사업인 반도체 부문이 흔들리면서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주력 사업인 메모리 부문에선 공격적인 가격 정책으로 수익성이 떨어진데다 AI 시대에 급부상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사업에서도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뺏겼다. 비메모리 부문의 주력 사업인 파운드리(위탁생산)에서도 경쟁사인 대만 TSMC에 밀려 적자 폭이 확대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현 상황을 헤쳐나갈 뚜렷한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도체 부문장과 메모리사업부장을 교체하고 경영진이 이례적인 반성문까지 발표했지만, 시장을 만족시킬만한 조치는 아니었다. 2025년 1월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삼성전자의 신용등급을 Aa2로 유지하면서도 신용등급 전망은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변경했다. 신용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는 의미는 향후 신용등급을 낮출 수 있다는 일종의 사전 경고와도 같다. 무디스는 전망 하향 조정의 근거로 'AI 반도체 기술 리더십의 약화'를 거론했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위기를 이끌어가는 리더의 부재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사건을 시작으로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회계 부정 의혹까지 지난 10년간 사법 리스크에 시달렸다. 이 회장은 2019년 등기이사 직함을 내려놓은 이후 경영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있다. 최근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며 이 회장이 다시 경영 전면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오지만, 검찰이 상고하면서 이마저도 어렵게 됐다.
삼성은 '(리더십을) 잃어버린 10년'에 따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리더십이 희미해지면서 삼성은 2017년 이후로 공격적인 M&A(인수합병)가 전무했고 AI 위주의 급격한 시장 변화를 예측하는 데 실패했다. 달리 말하면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삼성그룹 경영진이 소극적으로 의사결정 하는 방패막이가 된 셈이기도 하다.
반면 총수가 사법 리스크에서 자유로운 현대차그룹은 적극적인 M&A 와 투자로 미래 사업을 구상하는 데 주력할 수 있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2018년 수석 부회장에 올라 그룹 1인자로 입지를 다졌다. 이듬해인 2019년 직원들과의 타운홀 미팅에서 정 회장은 미래 현대차그룹의 매출 포트폴리오는 자동차 50%, UAM(도심항공모빌리티) 30%, 로보틱스 20%가 될 것이라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른 후속 투자도 바로 이어졌다. 2021년 현대차그룹은 로보틱스 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했고 미국 현지에 UAM 독립법인 수퍼널을 세웠다. 이 두 사업은 각각 1조원이 넘는 자금이 투입됐으며 현재까지 적자 상태다. 대규모 적자 사업에도 조단위의 돈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로보틱스와 UAM 사업에 대한 오너의 확고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인사 기조에서도 정 회장의 색깔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다. 현대차는 순혈주의에서 벗어나 국적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적극 영입하고 있다. 현대차 대표이사에 호세 무뇨스 사장을 앉힌 것만 해도 과거 현대차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보다. 무뇨스 사장을 북미영업법인 CEO로 영입하고 현대차 사내이사로 선임했을 때까지는 예상 가능한 범위 내 인사였다. 하지만 정 회장은 외국인이자 외부인인 무뇨스 사장을 그룹 핵심 회사인 현대차의 대표이사로 낙점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한다. 글로벌 사업에서 미국의 중요도를 높이겠다는 메시지를 인사를 통해 전달한 것이다.
삼성의 위기는 기술력이 부족해서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기술력의 부재라기보다는 기술 전략의 실패라고 보는 편이 맞다. 반도체 시장에 게임체인저로 평가받는 HBM. 1세대 모델의 개발(2013년)과 양산(2015년)은 SK하이닉스가 앞섰지만, 2세대 모델의 개발과 양산(4GB 기준, 2016년 1월)은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2018년)보다 빨랐다. 초기 시장에선 삼성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삼성은 2018년 8GB HBM2 양산을 끝으로 HBM 시장에서 의미있는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수익성이나 시장성이 불투명했던 HBM 개발을 잠시 접어두었던 것이다. 그사이 AI 시장이 개화하면서 최대 수혜주인 엔비디아가 급부상하게 된다. HBM의 수요처인 엔비디아가 떠오르자 3세대 HBM에서 승기를 잡은 SK하이닉스의 우위도 뚜렷해졌다. 이처럼 경영진의 순간적인 판단과 전략은 기업의 명운을 가른다. 특히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빠른 반도체 산업은 한번 시기를 놓치게 되면 첨단 경쟁에서 바로 도태된다.
급변하는 시장에서 헤매는 건 현대차도 마찬가지였다. 20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의 급격한 전환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왔다. 2020년 당시 현대차는 2040년부터는 미국, 유럽, 중국 등 주요 시장에서 내연기관 신차를 아예 판매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는 하이브리드라는 징검다리 없이 내연기관에서 바로 전기차로 가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하지만 2023년을 전후로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둔화 단계)이 찾아오면서 하이브리드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현대차는 일찍이 개발해둔 하이브리드 기술이 있었다. 현대차는 2009년 최초의 하이브리드 모델인 '아반떼 LPi 하이브리드'를 개발한 이후, 꾸준히 병렬형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고도화해왔다. 개발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으나 2010년 중반까지도 하이브리드는 현대차그룹 포트폴리오에서 크게 수익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시장 분위기가 급변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전기차 점유율이 10%대를 넘으면서 성장이 정체됐기 때문이다. 전기차 충전의 불편함, 화재에 대한 위험성 등이 부각되면서 '이제 전기차를 살 사람은 다 샀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대중들의 인식은 친환경차를 주목하고 있지만 실제 사용의 불편함을 생각하면 전기차엔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친환경차이면서도 충전의 불편함을 상쇄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가 주목받기 시작한 이유다.
2023년 전후로 현대차·기아는 하이브리드로 급격하게 전략을 선회했다. 글로벌 친환경차 판매 전략에 하이브리드를 적극 활용하고, 사실상 뒷전으로 밀려났던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도 다시 시작했다. 주행거리연장형전기차(EREV)와 제네시스 브랜드를 위한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다행히도 현대차는 미리 개발해둔 하이브리드라는 선택지가 있었기에, 시장 변화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전략 수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문제다. 자동차 산업이 AI(인공지능)와 본격적으로 접목하게 되면 이제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시장 변화에 속도가 붙게 된다. 한순간의 전략 실패는 기업의 명운을 가른다. 전기차에서 하이브리드는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정도였지만 AI와 자율주행으로 넘어가면 아예 챕터가 달라진다.
변화하는 조직문화와 인력구조에서도 두 회사에 차이가 있다. 삼성전자는 과거의 경직된 조직문화에 머물러 있는 반면 현대차는 최근 몇 년사이 유연한 조직 문화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인력구조도 삼성은 40대 이상 직원 비중이 꾸준히 늘어난 반면 현대차는 50대 이상 생산직의 대규모 정년퇴직으로 조직이 젊어지는 추세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경직된 조직문화'가 계속해서 거론되고 있다. 수익성 중심으로 안정적인 과제만을 중요시하고 도전적인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문화가 팽배해 있다는 지적이다. 수직적인 조직에서 복잡한 보고체계가 강조되면서 의사결정 속도가 늦어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위험을 회피하고 신중한 전략을 선호하는 보수적인 기업 문화 탓에 변화의 속도가 가장 빠른 반도체 산업 속도전에서 밀렸다는 주장이다.
글로벌 삼성전자의 인력 구조가 고연차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도 보수적인 기업 문화에 한몫했다. 한국CXO연구소가 삼성전자의 전 세계 연령대별 인원 현황을 분석한 결과, 2023년 처음으로 40대 이상 직원(8만1461명)이 20대 이하 직원 수(7만2525명)를 앞섰다. 연령별 직원 분포 현황을 보면 20대 이하 직원의 비중이 2015년에는 60%에 달했으나 2023년에는 27%로 급감했지만, 40대 이상 직원 수는 2015년 12%에서 2023년에는 30%로 늘었다.
반면 현대차는 2020년 이후 매년 2000여명 가량의 정년 퇴직자가 발생하는 구조로 조직이 점차 젊어지고 있다. 현대차 노조에 따르면 올해부터 향후 5년간(2025~2030년) 예정된 정년 퇴직자 수만 1만3000여명이 넘는다. 이는 2025년 기준 현대차 국내 직원의 20%에 달하는 규모다. 현대차는 정년 퇴직자를 촉탁직(계약직)으로 재고용하고 20대 직원의 신규 채용도 병행한다. 현대차그룹은 2025년부터 향후 3년간 국내에서 8만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는데, 이같은 대규모 정년 퇴직자의 발생이 예정돼있기에 가능한 숫자다.
정의선 회장은 2018년 총괄 수석부회장에 오른 이후 계속해서 '일하는 방식의 혁신'을 강조해왔다. 자율복장제도를 도입하고 유연근무를 활성화했으며 보고 체계를 간소화했다. 기아의 한 임원은 "급변하는 시장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의사 결정의 '골든 타임'을 놓쳐선 안 된다"며 "송호성 기아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임원들에게 사안의 경중을 판단해 필요할 경우 사후보고까지도 가능하도록 지시했다"고 말했다. 대면 보고를 최소화하고 이메일로 보고를 간소화하면서 일에 속도를 붙이기도 했다. 현대차그룹 한 관계자는 "장재훈 부회장도 정의선 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회장이 메일에 코멘트를 달아주는 방식으로 보고를 하곤 한다"며 "두꺼운 서류 파일을 만들고 모든 임원들의 보고·회의 시간을 맞추는 불필요한 일들이 사라지면서 일의 효율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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