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두산에너빌리티 창원 본사 원자력 공장 안에는 외부인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또 다른 비밀 공장이 있다. 이른바 '튜브공정샵'이다. 창원 공장 직원들도 별도로 인증을 받아야만 이곳에 들어갈 수 있다. 촬영이 금지된 것은 물론이다. 지난달 21일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이곳에 들어가니 중앙 작업대 위에 한쪽이 직선으로 구부러진 커다란 나선형의 금속 튜브가 놓여 있었다. 이 튜브의 정체는 미국 뉴스케일의 소형모듈원자로(SMR)에 들어가는 ‘헬리컬 앤드 밴딩(Helical & Banding) 전열관’이다.
증기발생기 안에 들어가는 기자재인 전열관은 핵분열로 발생한 열에너지를 전달받아 물을 데워 증기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 증기의 힘으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든다. 기존 대형원전에는 증기발생기 안에 U자형 튜브를 조밀하게 배치한다. 이에 비해 뉴스케일의 SMR은 나선형의 전열관이 연료봉을 촘촘히 감싸도록 디자인됐다. 헬리컬앤드밴딩 이라고 불리는 이 디자인은 뉴스케일만의 특허기술로 아직 제품화한 곳이 없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뉴스케일 SMR 재작성 검토를 진행하면서 이 나선형의 전열관을 세계 최초로 제작했다.
지난해 4월 클라우스 요하니스 루마니아 대통령이 이곳 두산에너빌리티 창원 공장을 방문했을 때도 이 시설을 둘러봤다고 한다. 루마니아는 현재 뉴스케일의 SMR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뉴스케일의 SMR을 상용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 전열관 기술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인공지능(AI) 시대로 접어들면서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이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자 글로벌 빅테크(거대 정보기술 기업)들이 앞다퉈 SMR에 투자하고 있다. SMR은 대형 원전에 비해 적은 부지에 건설할 수 있고 안전성과 효율성이 높아 데이터센터 전력원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장관도 인사청문회에서 대형원전보다 SMR을 대안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자연스럽게 두산에너빌리티가 AI 시대의 수혜주로 떠올랐다.
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 공장은 5만400㎡(약 1만5000평)로 축구장 6개 반을 합친 규모다. 총 5개의 베이로 구성돼 있으며 원자로, 증기발생기, 가압기, 냉각제 펌프 등 핵심 주기기를 생산한다. 지난해 3월 튜브공정샵까지 들어서며 세계 첫 SMR 전용 공장으로서 위용도 갖추게 됐다. 두산에너빌리티의 하창훈 SMR 프로젝트매니저(PM)장은 "고객사의 주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작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설명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수요증가에 대비해 SMR 전용 공장 신규건설 또한 검토 중이다.
원자로 주기기의 제작은 주조와 단조에서 시작한다. 주조는 쇳물을 금형에 부어 제조하는 방식, 단조는 금속 재료를 두드려 제조하는 방식이다. 이날 단조 공장에 들어가니 거대한 집게 손처럼 생긴 매니퓰레이터가 900℃로 달궈진 230t의 잉곳(쇳덩이)을 고정한 채 프레스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쇳덩이를 1만7000t의 프레스가 마치 찰흙덩어리를 매만지듯 가다듬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조밀도와 강도를 높이게 된다.
이 쇳덩이는 약 3주간의 작업을 거쳐 대형 원전에 들어가는 원자로 헤드로 재탄생한다. 대형원전의 경우 제강부터 납품까지 10~12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SMR의 경우에는 이 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 두산에너빌리티 배민근 주단생산관리팀장은 "SMR은 동일한 규격의 주기기를 반복 생산하기 때문에 제작 기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뉴스케일의 SMR은 77메가와트(㎿)급 소형원자로가 최대 12개 들어가는 구조다. 첫 번째 원자로를 제작한 이후부터는 동일한 규격이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후속 원자로를 제작할 수 있다는 얘기다. 두산에너빌리티 측은 "SMR도 초기에는 제작 단가가 비싸겠지만 공급 실적이 증가하면 대형 원전을 밑도는 수준으로 수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단조 공정에서 제작된 틀은 원자력 공장으로 옮겨져 가공 공정을 거치게 된다. 마침 이날 원자력 공장에서는 신한울 3·4호기에 들어갈 증기발생기의 가공 작업이 한창이었다. 하창훈 PM장은 “대형 원전에 비해 크기가 작은 SMR의 경우 이곳에서 원자로를 완성해 특수 트럭이나 배를 이용해 현장까지 이동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뉴스케일의 SMR은 미국내 어떠한 터널도 통과할 수 있게 폭 5m로 설계됐다고 한다.
두산에너빌리티는 ‘SMR 파운드리(위탁생산기업)’를 지향한다. 파운드리란 설계 전문 기업으로부터 의뢰받아 생산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업이다. 대만 반도체 파운드리인 TSMC가 대표적이다. 두산은 뉴스케일뿐만 아니라 미국 X에너지, 테라파워와도 주기기 공급권을 확보했다. 국내 국채 과제인 혁신형소형모듈원자로(i-SMR)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지난 20여년간 원자력 발전 시장은 정체기였다. 이 기간 미국과 서방 국가는 원전 노하우, 전문성, 공급망을 상실했다. 그 결과 3세대 원전을 자력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국가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 러시아 등 손에 꼽힌다.
우리나라도 과거 수년간 탈원전 영향으로 어느 정도 공급망에 타격을 입었으나 상대적으로 공급망과 제작 기술에 대한 신뢰도를 유지하고 있다. 두산은 지금까지 원자로 34대, 증기발생기 124대를 제작, 납품했다. 이 주기기들은 현재까지 국내외 원전에서 문제없이 가동하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다수의 해외 SMR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배경이다. 하창훈 PM장은 “연내 공식적인 납품 계약을 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희종 에너지 스페셜리스트 mindl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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