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판결이 난 형사사건의 피해자가 이 사건과 관련해 해당 피고인을 대상으로 제기한 민사소송의 주심판사가 앞선 형사사건의 주심판사와 동일인물로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소규모 지방법원에서 사무 분담을 통해 형사부에 있던 해당 판사가 민사부로 전보됐는데, 자신이 주심으로 관여했던 형사 사건과 관계된 민사 사건의 주심 판사로 배정된 것이다.
형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주심과 같은 판사라는 사실에 부담을 느낀 피해자는 재배당을 요청했으나 거절됐다. 규정상 재배당 사유에 해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재배당이 이뤄져도 형사 사건을 담당했던 또 다른 판사가 소속된 재판부로 배당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법조에선 ‘동일 당사자에 대한 동일 판사의 관련 사건 담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원 차원의 방안 모색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반면 지금처럼 재량에 맡기는 것이 재판부 쇼핑이나 사건 처리 속도 저하 등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의견도 있다.
재배당 요청 받아 들여지지 않아2021년 상반기 A 씨는 이웃주민인 B 씨가 자신을 비방하기 위해 인터넷 매체에 명예훼손을 했다며 형사 고소했다. A 씨는 B 씨를 상대로 같은 법원에 민사 손해배상 소송을 추가로 제기했다.
형사 사건에서 1·2심은 모두 B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올해 2월 법관 정기 인사이동에 따라 형사 사건 항소심의 주심을 맡았던 C 판사가 관련된 민사 사건의 주심 판사로 배정되는 일이 발생했다.
A 씨 측은 재판부 재배당을 신청했다. “민사사건의 청구원인이 사실상 관련 형사사건 판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하면 같은 주심판사에게 다시 민사재판을 받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민사사건 재판부는 대법원 예규상 재배당 사유가 아니라는 이유로 재배당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별도 규정 없어 법원별 재량에실제로 A 씨 사례처럼 형사사건 담당 판사가 관련 민사사건 재판부에 배당되는 경우의 재배당 여부는 대법원 예규에 별도 규정이 없어 법원별 재량에 맡겨져 있다.
민·형사소송법도 ‘전심(하급심) 관여 법관’을 법관 제척 사유로 규정하고 있을 뿐, 관련 있는 다른 사건을 담당했던 법관이 재판을 맡는 것에 대해서는 제척 사유로 규정하지 않는다. 형사사건 담당 판사가 관련 민사사건의 재판부 소속이 되더라도 법관 기피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1985년 대법원 결정(1985두1)도 있다.
규모가 작은 법원은 합의부가 민사, 형사 각각 1~2개뿐이어서 재배당되더라도 형사사건에 관여했던 또 다른 법관이 소속된 재판부로 재배당될 수 있어 결국 재배당이 무용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재판부 재배당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법관사무분담위원회 논의를 거쳐 재배당 필요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재배당 판단이 내려질 경우에는 △담당 사건 수가 비교적 적은 ‘재정합의부’ 등으로 사건을 보내거나 △별도의 재판부를 꾸려 사건을 맡기는 식으로 문제를 정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규모 법원 대다수가 법관 예비 인력에 여유가 없어 쉽지 않은 실정이다.
재판부 쇼핑에 악용될 가능성도법조에선 통일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지원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소규모 법원이나 지원에서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다”며 “그럴 때 법관 스스로 사건을 회피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누구도 이를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짚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 입장에선 재판 결과에 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당사자뿐 아니라 법관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고, 결과적으로 법원에 대한 신뢰가 저하될까 우려된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규모가 큰 법원에선 다른 민사 재판부로 손쉽게 배당할 수 있지만만, 규모가 작은 법원에선 방안 마련이 쉽지 않으므로 대법원 차원에서 해결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재배당 규정을 현행 규정보다 세분화해선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재배당이나 재판 회피·기피·제척 규정이 자세해질수록 오히려 재판부 쇼핑에 악용될 가능성이 커질 뿐 아니라 재배당이 잦아지면 사건 처리 속도가 느려지고 법관들의 업무 부담만 커질 거란 우려에서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규정이 생기면 법원에 따라선 사무분담과 재판부 운용의 합리성과 융통성이 사라지는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며 “지금처럼 담당 재판부와 법원 내 재량 합의에 따라 재배당을 결정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실관계가 같은 민·형사 재판일지라도 같은 판사가 두 사건 모두 맡는다고 해서 문제될 일은 없다”며 “민·형사 소송은 각각 증거에 관한 법리가 완전히 다르기에 형사 무죄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가해자에 대한 민사 손해배상 사건에서도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할 거란 보장은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홍윤지 법률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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