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1. 국내 M제약회사는 미국 제약사와의 국제무역위원회(ITC) 특허 소송에서 ‘제3자 자금 지원(Third Party Funding·TPF)’을 활용해 소송 비용 부담을 덜었다. 비록 패소했지만 소송 비용을 모두 자금을 댄 회사(funder)가 부담해 재무적 손실을 피할 수 있었다.
#2. 미국 에너지기업 B사는 국내 에너지기업 P사를 상대로 10억 달러 규모의 중재 신청 및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비용은 TPF로 조달했다. 분쟁은 합의금 지급으로 종결됐다.
#3. 터키의 한 건설사는 소송에서 승소했으나 판결을 집행하는 데 애를 먹었다. TPF의 도움을 받아 채무자의 해외 자산을 압류했다. 이후 관할 위반 소송에서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채무자와 합의에 성공했다.
소송 비용을 일부 내지 전액 보조해 주는 조건으로 승소 시 일정 비율의 수익을 가져가는 TPF 시장이 커지고 있다. 패소 시에는 비용을 회수하지 않기 때문에 국제 중재 등 비용 부담이 큰 국제 분쟁에서 당사자 부담을 줄이고 위험을 분산하는 수단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을 끌고 있다.
영국·독일·프랑스 관련 규제 정비 나서
TPF는 일종의 ‘성공 보수’ 개념을 취하고 있다. 영미권 보통법계에서는 원칙적으로 소송과 상관없는 자가 소송 당사자에게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금한다. 이를 ‘소송 원조(champerty)’라 정의하며 변호사 윤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일부 보통법 국가에서 이를 완화하면서 TPF 시장을 창출하고 나아가 활성화하고 있다. TPF가 가장 활발한 국가는 미국, 호주, 영국이다. 미국과 호주는 판례를 통해 법적 쟁점을 해소했다. 싱가포르는 2017년 입법으로 관련 규제를 정비하고 국제 중재 사건에서 TPF를 공식 허용했다. 2021년부터는 IP와 반독점 사건에도 제한적으로 적용했다. 유럽에서는 영국, 독일, 프랑스가 관련 규제 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형근(50·사법연수원 34기)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2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콘래드 서울에서 열린 ‘2025 한국 TPF 시장의 분석과 전망’ 포럼에 참석해 “최근 몇 년간 TPF와 관련한 법적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해소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TPF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며 “연평균 8~12%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연간 투자 규모가 150억~200억 달러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TPF 시장이 커지는 데는 국경을 초월한, 복잡 다단한 분쟁이 증가하고 그에 따른 비용이 상상 이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형근 변호사는 “일부 국가가 디스커버리 절차를 도입함에 따라 소송 비용이 크게 증가했다”며 “이럴 때 TPF를 활용하면 승소 가능성을 평가하고 위험을 분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 중재에서 활용도 높아져
TPF는 국제 중재 사건에서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국제상업회의소(ICC), 런던국제중재법원(LCIA) 등 주요 국제 중재 기관은 TPF를 허락하면서 TPF 사용 시 공개 의무와 비용 산정 시 고려할 사항을 규정해 두고 있다. 이상엽 대한상사중재원 국제중재센터 외국변호사는 이날 행사에서 “중재는 법원 판결과 달리 최종적이고 강제 집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TPF의 활용이 유용하다”며 “대한상사중재원도 국제중재규칙 개정을 통해 TPF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법무부와 대한변호사협회와 협력해 국제중재에서 TPF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형근 변호사도 “TPF가 국제 분쟁 해결의 주요 도구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해충돌 문제, 펀딩 사실의 공개 여부, 자료 공유의 시기와 범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준혁(47·33기)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TPF는 국제 중재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고, 승소하거나 중재를 통해 채권을 확보했으나 강제 집행이 어려운 경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비용문제 해결…의사결정 도와"
심종혁 포스코인터내셔널 법무1그룹장은 TPF가 소송 당사자로서 기업들이 겪는 어려움과 TPF 도입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초국적으로 거래와 투자가 활발해짐에 따라 여러 분쟁이 발생하면서 기업은 재무적 부담뿐 아니라 심리적 압박도 겪는다”며 “TPF는 비용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소송 과정에서 기업 경영진이 느끼는 압박을 완화해 의사결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기업 내부 기밀이 제3자에게 공유되는 위험 요소가 존재해 비밀 유지 의무, 승소 가능성, 금액 등을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 시장은 걸음마 단계
한국의 TPF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다. 이상엽 외국변호사는 “국내법 상 TPF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은 없지만, 변호사와 비변호사 간 수임료 분배가 금지돼 활성화가 어렵다”며 현 시장 상황을 설명했다. 김세연(57·23기)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싱가포르와 홍콩은 국가 차원에서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한국도 정보 공유와 이해충돌 방지를 위한 규칙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영 법률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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