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 고조에 '쿠바 미사일 위기' 등 과거 사례도 소환
덤덤한 미국…장기적 상황은 예의주시해야 진단도
(서울=연합뉴스) 이신영 기자 = 미국의 장거리 미사일 봉인 해제에 러시아가 '핵 카드'로 맞불을 놓으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핵무기를 앞세운 러시아의 으름장에 과거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두고 대립했던 냉전 시대의 '악몽'까지 소환되고 있지만 미국은 아직은 말뿐인 위협으로 치부하며 덤덤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핵 교리 개정이 미국과 서방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분석하면서도 향후 전쟁 양상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장담할 수 없는 만큼 러시아의 대응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 핵 카드 꺼내든 러시아…'쿠바 미사일 위기' 악몽도 소환
러시아는 사실 지난 9월부터 핵무기 사용 원칙을 담은 핵 교리를 개정할 수 있다고 서방을 압박해왔다.
우크라이나가 미국과 유럽에 러시아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사용을 승인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이면 러시아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는 점을 시사한 셈이다.
경고성 메시지를 날려오던 러시아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전술 탄도미사일 에이태큼스(ATACMS) 사용을 허가하자 곧바로 핵 교리 개정을 승인하는 강수를 뒀다.
수정된 핵 교리의 핵심은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은 비핵보유국에 의한 어떠한 공격도 공동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러시아와 동맹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에 '중대한 위협'을 제기하는 적국의 재래식 무기 공격에도 핵무기를 쓸 수 있다고 규정해 핵 사용의 범위와 조건을 넓혔다.
서방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가 장거리 미사일 공격에 나설 경우 러시아가 핵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경고다.
러시아가 때에 따라 비핵보유국에도 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으로, 그만큼 이번 사안을 첨예하게 보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러시아가 미국의 이번 결정으로 3차대전이 촉발될 수 있다고까지 압박하고 나서면서 과거 미국과 소련이 핵을 두고 대립했던 위기 상황도 다시 소환되고 있다.
가장 위험했던 순간으로 꼽히는 것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다.
당시 소련이 쿠바에 탄도미사일 기지를 건설 중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양측의 대립은 핵전쟁 발발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다.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숨 막히는 외교전 끝에 미국은 튀르키예와 중동에 설치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철수하고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소련은 쿠바 미사일 건설 기지 계획을 철회함으로써 사태가 봉합됐다.
1983년 소련의 조기경보 위성이 오작동했을 때도 핵전쟁 발발 위험이 있었다.
당시 미국이 5기의 지상 발사 미사일을 소련을 향해 발사한 것으로 탐지되면서 핵전쟁 위험이 고조됐지만, 당직 장교였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중령은 진짜 공격이라면 미국이 미사일을 5개만 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고 오류라는 판단을 내렸다.
다행히 인공위성이 햇빛을 ICBM의 발사 섬광으로 잘못 인식한 것임이 드러나 세계는 핵전쟁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 미국 "협상 카드일 뿐"…확전 우려 여전
러시아의 격한 반응과 달리 미국의 대응은 오히려 덤덤하다.
러시아의 핵 교리 개정이 놀랄만한 수준은 아니며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협상카드일 뿐이라는 해석이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실체 없이 말만 요란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러시아의 실제적인 핵 태세에는 큰 변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다만 단기적인 변화는 없을지 몰라도 러시아의 핵 사용 문턱이 낮아진 것은 분명한 만큼 전쟁 양상에 따라 장기적인 상황은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수십년간 핵 위험을 추적해 온 매슈 번 하버드대 교수는 러시아의 핵 교리 개정이 유럽과 미국에 겁을 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중단시키려는 시도로 보고 "러시아가 핵을 사용할 단기 확률은 실제로는 증가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다만 그는 "핵전쟁의 장기 확률은 아마도 약간 증가했을 것"이라며 "미국의 러시아에 대한 공격 지원 의지가 서방에 대한 푸틴의 증오와 공포를 강화하고 있고, 이에 자극받은 러시아의 대응이 서방의 공포와 증오를 끌어올릴 공산이 크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의 러시아 정치분석 싱크탱크 '알 퍼블리크'의 창립자 타티아나 스타노바야는 핵 교리 변경이 몇 달간 예고됐지만 실제 발표는 미국의 장거리 미사일 사용 승인 시점에 의도적으로 맞춰졌다며 시점에 주목했다.
조 바이든 정부의 결정과 핵 교리 개정의 연관성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이라는 의미다.
스타노바야는 특히 "러시아가 핵 공격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확전의 유혹을 느낄 수 있다고도 분석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이 서방에 "핵전쟁을 하든지 아니면 러시아가 원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라"는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다며 지금이 매우 위험한 시기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는 가장 난제는 푸틴 대통령의 속마음을 추측하는 것이라며 최근 몇 년간 러시아에서 핵무기 위협이 일상이 되면서 심리적인 문턱이 낮아졌을 수 있다고도 짚었다.
서방의 관점에서 핵무기 사용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푸틴 대통령의 선택을 가늠할 수 없는 만큼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는 분석이다.
eshi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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