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기존 투자이민 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내놓은 이른바 '골드 카드'는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장 비싼 영주권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약 100개 국가가 유사한 제도, 일명 '골든 비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각국의 경제 여건에 따라 영주권 취득 자격은 천차만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미국 영주권을 제공하는 '골드 카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미 대규모 일자리를 만드는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영주권(그린 카드)을 주는 'EB-5' 프로그램을 1990년부터 운영해 왔다. 그러나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이날 "EB-5는 비합리적이며, 싼 가격에 그린카드를 취하는 수단"이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EB-5는 지역에 따라 최대 180만달러(약 26억원)의 투자금으로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는 제도였다. 이를 대체할 골드 카드는 500만달러(약 73억원)로 책정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영주권 판매'로 국가 재정을 충당할 가능성도 시사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글로벌 억만장자들이 "골드 카드에 목말라할 것"이라며 "우리가 100만명에게만 팔아도 5조달러(약 7300조원)를 얻는다"고 주장했다.
8일 영국계 자산 관리 전문 업체인 헨리 앤 파트너스에 따르면, 이달 기준 전 세계 100여개 국가는 이미 투자를 대가로 영주권을 발급하는 '골든 비자' 제도를 운영 중이다. 대부분의 골든 비자는 부동산, 펀드 등 일정 금액을 투자하는 대가로 영주권을 부여한다. 골드 카드는 이런 자산 매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골드 카드 정책이 도입되면, 즉각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영주권이 된다. 헨리 앤 파트너스가 제공하는 전 세계 골든 비자 현황 정보를 보면 현재 가장 비싼 영주권 프로그램은 싱가포르에 있다. 1000만싱가포르달러(약 780만달러·113억)를 싱가포르 기업에 투자하면 취득할 수 있다. 해당 비자는 국제 금융과 해운 중심지인 싱가포르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는 점에서 특히 기업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아시아 금융 허브인 홍콩에서 영주권을 얻으려면 380만달러 투자가 필요하다. 254만달러(37억원)의 스타트업 펀드 납입을 요구하는 영국 골든 비자도 비싸기는 마찬가지다.
골드 카드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대로 큰 인기를 끌게 될까. 헨리 앤 파트너스는 지난달 26일 낸 성명에서 "미국은 전 세계 총 에쿼티(유동성)의 37%가 흘러드는 나라"라며 "여전히 미국은 민간 부(富) 창출의 선두 그룹이며, 골드 카드는 부유층에게 또 다른 독특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십억원대 투자금을 대가로 부자들이 영주권을 취득하려 한다는 점에서 골드 카드는 살기 좋은 나라들의 위상을 반영한다.
영주권 '판매'를 통해 정부 재정 부담을 덜어내려는 시도 또한 새로운 일은 아니다. 2010년 남유럽 부채 위기 당시 그리스, 포르투갈 등 일부 남유럽 국가들은 골든 비자 취득 요건을 하향해 수많은 부자들을 끌어모았다.
이들 국가는 고가 부동산에 투자한 부유층에 영주권을 발급했는데, 경제 위기로 침체한 주택 경기를 부양하고 세수를 확보하는데 요긴하게 활용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애초 포르투갈은 2023년 골든 비자 제도를 종료할 방침이었으나, 의회 토론 이후 부동산 투자 이민 요건만 기부, 스타트업 투자 등으로 바꿔 유지하기로 했다.
한국도 2010년 제주, 인천, 강원 등 특정 지역의 부동산이나 공익사업에 투자하면 거주비자(F-2)를 발급하고, 5년 동안 유지하면 영주권을 부여하는 투자이민제를 시행한 바 있다. 2023년 투자 기준금액은 10억원으로 상향 조정됐다.
골든 비자가 경기 활성화의 한 방책으로 쓰이다 보니, 영주권 간의 ‘빈부 격차’를 드러내기도 한다.
남태평양 도시국가인 나우루는 지난해 11월부터 ‘나우루 경제 및 기후회복력 시민권’이라는 정책을 시행, 10만5000달러(약 1억5000만원)를 기부한 개인에 시민권을 발급하고 있다. 영연방의 일원인 나우루 시민이 되면 89개 국가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나우루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시민권 판매에 나선 배경에는 기후 위기가 있다. 섬나라인 나우루는 해수면 상승, 반복적인 홍수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 약 1만명을 고지대로 이주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나선 상황이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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