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탁한 시국에 지독한 염증을 앓다 홀연히 출국(出國)을 했다. 나흘간의 북경(北京) 여행, 하노이 탐방 이후 2년 만의 외국행이었다. 어릴 적부터 《주원장(朱元璋)》 《강희왕조(康熙王朝)》 《대청풍운(大清風雲)》 《강산풍우정(江山風雨情)》 등 명청(明淸) 시대의 사극을 즐겨 봐 온 필자에게 북경 기행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비록 시간적 여유가 부족해 선택한 짧은 패키지여행이었지만, 사적(史跡) 견학 중심으로 구성된 터라 중국 문화의 정수(精髓)를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정이었다.
권력무상, 만리장성과 이화원
정월의 삭풍(朔風)이 몰아쳐도 위용이 장구(長久)했던 만리장성(萬里長城). 우리나라 특유의 깎아지른 험산준령과는 다른, 완만한 능선의 첩첩산중이었기에 기동력 좋은 유목 이족(異族)의 침공을 방비하는 데 필수적인 듯했다.
진시황의 만용적(蠻勇的) 이상과 명말청초(明末淸初) 그 난세의 비감(悲感)이 아로새겨진 광활한 산성(山城)에서부터, 화려찬란했던 명청 황실의 흥망(興亡)을 지켜봐온 자금성(紫禁城)에 이르기까지. 아연한 규모와 유구한 역사에 놀라고, 관광 산업은 내수만으로도 충분해 보일 듯한 인산인해(人山人海)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청조의 명군(明君) 건륭제(乾隆帝)가 효심으로 지어 올리고, 망국의 요부(妖婦) 서태후(西太后)가 여름 별장으로 유용했던 이화원(頥和園)은 인공의 정취보다는 권력의 살기(殺氣)를 머금은 곳이었다.
이화원은 서태후가 군림하며 향락과 사치의 절정을 누렸다는데, 정전(政殿) 앞 석상(石像) 가운데 봉황이 안쪽이고 황룡이 바깥쪽에 세워진 것이 특징이다. 태후가 비록 후궁이나, 청말 당시에는 제왕을 능가한 천하권세(天下權勢)의 중심이었다는 상징적 조형이라고 한다.
노을 진 황실, 자금성의 군벌들
명의 역대 황제 가운데 3대 영락제(永樂帝)부터 마지막 숭정제(崇禎帝)까지 안장된 명십삼릉(明十三陵)의 정릉(定陵), 13대 만력제(萬曆帝)의 지하궁전에는 옥좌(玉座)가 자리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승에서까지 용상(龍床)에 앉아 임금 노릇을 하려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재위 초의 총기와 달리 말년에 암군(暗君)으로 추락한 만력제의 최후를 생각한다면 지궁(地宮)의 위엄은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한때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자신들의 대제국(大帝國)이 안팎으로 무너지는 줄도 모른 채, 아니 짐짓 알면서도 한 줌의 권력 놀음에 도취했던 위정자들의 정치적 파산. 명말의 이자성(李自成)은 농민봉기로 민심을 얻어 자금성을 점령하고서도, 허황한 황제 놀이로 소일하다 청군에 내쫓겨 몰락했다. 동시대의 용장(勇將) 오삼계는 명이 망하자 사수하던 만리장성의 동쪽 관문 산해관(山海關)을 청에 내주고 평서왕(平西王)에 책봉됐으나, 삼번(三藩)의 난으로 강희제(康熙帝)에 대적하다 거듭 오명을 남겼다. 수렴청정과 흑막정치로 황실을 뒤흔들고 국사(國事)를 농단해 온 서태후는, 국운(國運)을 쇠하게 해 청의 멸망을 가져온 악녀(惡女)로 지탄받게 됐다. 청조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원세개(袁世凱)는 반(反)봉건 혁명에 합류하고서도, 총통 독재도 모자라 자금성에서 황제를 참칭하다 오래 못 가 하야한 뒤 급사했다.
이번 북경 기행에서 본 이화원, 자금성, 만리장성에 얽힌 명청 시대의 권력자들은 모두 끝없는 권력욕으로 쇠망했다. 거병(擧兵)의 대의(大義)는 휘황한 궁성(宮城) 앞에서 덧없이 허물어졌다. 타오르는 권력의지로 휘둘러 온 혁명의 기치는 집권 후 독선의 정치로 변질됐다.
제국의 낙일(落日)과 공화정의 수립, 그 후에도 중국의 정치는 분열의 내전(內戰)과 위선(僞善)의 독재로 점철되다 끝내 자유를 잃고 사회주의 그리고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했다.
감시 도시, 한국인을 내쫓은 공안
서울 면적의 26배에 달하는 북경은 원나라 시절 대도(大都)라는 이름으로 조성된 일종의 기획도시로 출발, 명청 시대 황도(皇都)로 올라서며 오늘날까지 중국의 명실상부한 수도로 자리매김해 왔다. 특히 '경제의 도시'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는데, 과거 상해(上海)의 기업들이 이주해와 근 수십 년간 급성장했다고 한다.
실제 필자가 본 북경 시내에도, 문화재 외에 각종 기업의 빌딩들이 마천루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거미줄처럼 위아래로 교차하는 고가도로마다 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내달렸고, 빌딩 불빛으로 수놓은 야경은 서울의 그것 못지않게 볼만했다. 예상 외로, 중국인의 공중도덕 수준도 걱정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첨단 도시의 이면에는, 만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요소가 무장하고 있었다. 출입국 절차는 지문채취와 안면인식, 검문검색으로 번거로웠고 주요 관광지의 경우 외국인은 여권이 필수였다. 공항과 관광지는 물론, 거리 곳곳에는 여러 대의 CCTV가 돌출돼 있었고 도처에 공안(公安) 경찰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직접적인 마찰도 발생했다. 자금성 뒷골목, 옛 고관(高官)들이 살던 고택(古宅) 거리에서 중국인 문화 해설사가 필자를 비롯한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설명을 하다 근처를 순시하던 공안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우람한 덩치의 공안은 해설사의 태극기를 뺏고 큰소리로 폭언을 내뱉으며 그를 몰아세웠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내지를 기세였음에도, 곁의 동료 공안들은 수수방관이었다. 폭력적 언행이 거의 2분간 계속된 터에 우리 여행객도 덩달아 거리에서 내쫓겼다.
명색이 자국민을 지키는 경찰임에도 민간인을 전쟁포로 다루듯 하는 거친 행태, 70~80년대 골목길에서 시비를 걸던 깡패들만큼이나 광분하며 달려드는 모습.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도 아닌, 일반 자국 시민을 내키는 대로 억압하는 모습에서 인권이 상실된 중국의 민낯을 직면했다.
나중에 현지 가이드에게 들으니 당시 해설사가 우리를 인도하던 길목이자 해당 공안이 지키던 곳에 문화유산이 있었고, 유네스코 지정을 위한 심사 관련으로 중국 공산당의 고위 관료들이 진입하던 때라, 공안이 민감하게 군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이유를 감안하더라도, 그 같은 행위는 한국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CCTV 찍히면 三代 정보가 다 나온다"
현지 가이드 해설에 따르면, 중국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국정치사상사를 교육해 '공산당 사상'을 주입시킨다고 한다. 도처의 CCTV는 화질은 다소 떨어지지만, 인물이 식별되면 삼대(三代)의 신상 기록이 전부 파악된다고도 했다.
이 가이드는 시진핑 집권 이래, 중국 부유층에 대한 외국에서의 소비 통제가 강화됐고 일반인의 외국관광 소비 또한 제한됐다고 했다. 중국 현지에서는 외국인이 가이드 직업을 할 수 없다고도 했다. 여행 당시 날씨와 공기가 무척 맑게 느껴진 것도, 하계와 동계 올림픽을 거치며 중앙정부의 강압으로 기존 공장들을 폐쇄시킨 까닭이라고 했다.
자본주의의 숨통을 약간씩 열어주는 대신에, 기업과 개인을 향한 국가권력의 간섭과 권리 침해는 더욱 강력하고 자연스럽게 인민들을 옥죄고 있던 것이었다.
북경으로 떠나온 며칠 뒤, 한국은 이른바 '대통령 사냥'의 체포 정국으로 뒤숭숭했다.
우리가 내부 싸움에 골몰할 때, 제국을 삼킨 전체주의 독재의 그림자는 대륙에서 한반도로 암운(暗雲)이 되어 드리우고 있다. 문화 왜곡과 산업 패권의 공세로 끝날 일이 아닐 것이다. 사상 검증과 자유 박탈,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감시 분위기가 엄습하는 것이 어찌 이웃나라만의 일이겠는가.
신승민 시인·문학평론가 (前 월간조선 기자)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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